청년 없는 지방에서 피어난 젊은 버스기사의 로맨스
[김성호 기자]
세계로 나가 다양한 나라들을 돌아보다 보면 한국이 참으로 독특한 나라란 걸 실감하게 된다.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아이를 낳지 않고, 또 서른을 훌쩍 넘겨서까지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수두룩하며, 거의 전 국민이라 해도 좋을 만큼 많은 수가 대도시적 삶을 살아간다는 점이 그렇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한국이 서울에 집중된 기형적 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일 테다. 한국의 인구밀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표기한 지도에선 서울과 수도권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텅 빈 모습으로 그려지기 십상이다. 제2의 도시라는 부산마저도 좋은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청년들이 떠나가는 형편이다. 하물며 중소도시의 사정이야.
▲ 창밖은 겨울 포스터 |
ⓒ ㈜영화사 진진 |
경남 진해에서 사는 청년의 삶
<창밖은 겨울>은 근래 흔치 않은 지방 배경의 영화다. 경상남도 진해를 배경으로, 그곳에서 버스기사로 일하는 청년 석우(곽민규 분)와 터미널 매표소 직원 영애(한선화 분) 사이의 이야기를 그린다.
한 때 영화감독을 꿈꿨던 석우는 작품이 잘 되지 않자 고향인 진해로 낙향하여 버스기사로 취업한다. 영화 촬영차 대형면허를 따둔 것이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하는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한때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과정에서 애인과도 이별을 고하게 된다. 석우와 마찬가지로 영화일을 했던 그녀는 아직도 계속 영화판에 남아 있는 모양이지만, 고향으로 와서는 영화판을 쳐다보지도 않는 석우가 그녀의 소식을 알 리가 없다.
▲ 창밖은 겨울 스틸컷 |
ⓒ ㈜영화사 진진 |
낯익은 뒷모습, 그녀가 놓고간 MP3
그러던 어느 날이다. 운행을 마치고 터미널에 들어선 석우의 눈에 낯익은 뒷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잠시 눈을 뗀 사이, 그녀가 사라졌다. 여자가 떠난 터미널 대합실 자리엔 MP3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 석우는 이게 분실물이라 생각하고 챙겨 터미널 분실물 담당자에게 건넨다. 그 담당자가 바로 매표소 직원 영애다.
시대가 어느 때인가. MP3는 과거의 유물로 남겨진 지 오래다. 아이팟을 넘어 이제는 스마트폰으로 전화는 물론 음악까지 듣는 것이 기본이 된 세상이다. MP3가 CD플레이어를, 또 CD플레이어가 그 전의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를 대체했듯이 MP3도 쓰는 이 없는 물건이 된 지 오래다.
▲ 창밖은 겨울 스틸컷 |
ⓒ ㈜영화사 진진 |
서툴러서 낯선 소도시의 로맨스
답답한 구석이 있는 석우에게 영애가 묘한 감정을 품는 건 그때부터다. 도대체 왜 켜지지도 않는 MP3의 주인을 찾겠다고 저 난리를 피우는 건지, 처음엔 호기심이었다가 조금씩 마음을 키워가는 것이다.
어느 날부터는 기사들만 이용하던 휴게실에 영애가 나타나 화려한 탁구솜씨를 뽐내더니, 마침내 석우와 조를 이뤄 운수회사들이 주최한 탁구대회까지 나가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탁구연습을 하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해나가는 과정이 근래 로맨스 영화에선 보기 드문 잔잔한 연출 가운데 그려진다.
▲ 창밖은 겨울 스틸컷 |
ⓒ ㈜영화사 진진 |
한국영화에서 찾기 힘든 지방의 목소리
언제나 화려하고 무언가 가득한 모습을 보게 되는 영화 속에서 이토록 텅 빈 듯한 헛헛함을 마주하게 되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이는 한국 영화에서 점점 더 지방도시가 설 자리를 잃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을 비롯하여 부산과 전주, 강릉과 무주 등 영화제가 있는 도시 정도가 그나마 지원을 받아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전부다. 그리하여 한국영화에서 진해와 같은 곳이 이처럼 인상적으로 등장하는 일을 귀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창밖은 겨울>은 여러모로 근래 보기 드문 로맨스다. 낯선 도시에서 익숙하지 않은 속도로 마음을 나누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평소 잊고 있었던 특별한 감상을 일으킨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선 자리에서 다른 무엇을 보게 마련이다. 선 곳이 달라지면 다른 시야로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진해에서의 삶을 잠시 보는 것만으로도 온통 빠른 것들 가운데 치여 있던 지친 마음이 조금쯤 여유를 갖게 될지 모를 일이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어떤 위안을 던진다는 평가를 받고는 하는 것도 그래서가 아닐까.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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