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해양소설이라 이름 붙여도 과함이 없을 작품"

윤성효 2023. 12. 15. 09:1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오성은 작가 첫 장편 <라스팔마스는 없다> 펴내 ... 백가흠 "독자로서 축복"

[윤성효 기자]

 오성은 작가의 장편소설 <라스팔마스는 없다>.
ⓒ 은행나무출판사
 
"따뜻한 성정과 인류애를 떠오르게 하면서 차갑고 냉정한 세계와도 마주하게 하는 작품."

백가흠 소설가가 오성은 작가의 장편소설 <라스팔마스는 없다>(은행나무출판사 간)를 이같이 평가했다. 부산 출신인 오 작가는 2018년 '진주가을문예'에 중편소설 <런웨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이번 소설은 그의 첫 장편이다.

소설은 영도 연안에서 기름배를 모는 선장 심만호가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뒤 수십 편의 글 뭉치만을 남긴 채 자취를 감추면서부터 시작된다.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린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규보. 아버지가 남긴 '글'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통해 규보는 그동안 아버지가 감춰왔던 진심과 표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한다.

흐려지는 기억을 붙들기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 실은 심 선장 스스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 매개체가 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이 작품 속에서 '글'이 인물 내면에서 작동하는 방식은 굉장히 인상적이다.

아버지가 쓴 글을 읽어나가는 규보, '이문'이란 공간에서 쓰고 낭독하는 일, 만호가 지어 보낸 아들의 이름 등 많은 것들이 '글로써 직면하기'와 맞닿아 있다.

또 소설은 환상(아버지의 글)과 현실(사람들의 증언)을 오가는 구성을 차용해 바다가 품고 있는 불확실성을 기저에 깔고, 대양을 둘러싼 외항 선원들의 이야기를 촘촘하고 밀도 있게 쌓아나간다.

그러는 한편 심 선장의 어머니인 성주댁, 규보의 어머니인 경희씨의 이야기는 거친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바다처럼 잔잔하고 서정적으로 흐르며 소설의 균형을 잡는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바다는 마음을 바꾸고 자리로 돌아가 해를 보드랍게 만지작거리거나 투명한 물빛을 내어놓으며 이리 들어오라 하는 거야. 바다에는 거북이가 살고, 소라도 살고, 가자미가 성게가 해파리가 살고 ... 그리고 거기에 네 아버지가 있다"(본문 일부).

심만호 선장은 무성호의 주인이다. 젊은 시절 외항선 선원이었지만 지병을 앓던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규보를 돌보기 위해 뭍으로 돌아와 내항선 선장 자격증을 취득한다.

그는 전 재산을 끌어 모아 작은 유류선 한 척을 사들여 '무성호'라 이름 붙인다. 무성호는 심 선장의 몸이 되어 바다 이곳저곳을 누비고, 심 선장은 기름을 운반한 돈을 모아 규보를 키웠다.

규보는 한 경비업체의 사무원으로 취직해 9년을 근속으로 일하던 중, 자신과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제안에 뱃사람이 된다. 하지만 아버지와 일하는 방식이 극명하게 달랐던 규보는 결국 뱃일을 그만두고, 이후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며 종종 아버지의 식사를 챙기러 영도 항구로 간다.

바다는 자유와 속박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어디로도 갈 수 없는 곳. 배는 끝없는 망망대해 위에 있지만 선원들은 오직 배 위에서만 생존할 수 있고, 바닷길은 어디로든 뚫려 있지만 배가 갈 수 있는 길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심 선장은 외항선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돌아와서도 바다와 배를 떠나지 못한다. 바다 위에서의 고립된 시간이 그에게 심각한 우울증을 유발했음에도 배를 계속 탄다. 탈 수밖에 없다. 평생 파도를 가르며 살아온 심 선장에게 '바다'는 삶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츠하이머 판정은 그에게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에 대한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고 종국엔 자신까지 잃어가는 병. 하지만 심 선장이 기억을 붙들기 위해 글을 써나가는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그를 '스스로' 움직이게 한다.

한편 소설은 부산 영도, 특히 항구를 중심으로 한 깡깡이 마을의 변화를 섬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파도를 가르는 거친 갑판 위의 삶을 뒤로하고 그가 돌아온 곳은, 그를 숨 쉬게 했던 기억으로 가득한 고향 영도다.

실제 '깡깡이 마을'은 선박의 표면에 슨 녹을 벗겨내는 망치질 소리 때문에 '깡깡이 마을'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작품 속에서 성주댁이 만호를 키우기 위해 몸 바쳤던 일이기도 하다.

깡깡이질 소리가 울려퍼지던 마을은 시대가 바뀌며 이제 깡깡이 예술마을로 변화했고, 이는 만호의 세대가 규보의 세대로 넘어갔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백가흠 소설가는 "작가 오성은의 문학적 여정을 함께한다는 것, 같은 시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은 독자로서 축복이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천재적인 감각성에 녹아든다"라고 했다.

그는 "<라스팔마스는 없다>는 부산 소설이라 해도 좋을 것이고, 본격 해양 소설이라 이름 붙여도 과함이 없을 것이다. 그가 지닌 따뜻한 성정과 인류애를 떠오르게 하면서, 차갑고 냉정한 세계와도 마주하게 하는 작품이다"라고 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