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인의 조선가족실록] 출세보다 지조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처럼 살 건가”
올곧은 선비의 모델 최수성
원정(猿亭) 최수성(崔壽峸·1487~1521)은 그 자신의 독특한 행보로 이목을 끌었지만 가족사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함축하는 인물이다. 우선 그는 ‘매질구명(賣姪求名)’이라는 고사를 탄생시킨 주연으로 숙부 최세절(1479~1535)이 그를 팔아 출세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가족 관계와 그 가치를 중시하던 시대에 자기 이익을 위해 가족을 이용한다는 설정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다.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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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김굉필, 동문 조광조의 죽음
권신들이 활개치는 세상과 등져
글·그림·음악에 두루 능한 재주꾼
조카인 신사임당에 영향 미쳐
숙부에 관직 사퇴 권유하다 참형
조작과 무고의 희생양으로 남아
」
강릉 일대서 일어선 사족 집안
강릉에 근거지를 둔 최씨 집안은 여말선초에 지역 사족으로 성장해가는데, 그 중심에 세종대에 형조참판을 지낸 최치운(1390~1440)과 연산군대에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1428~1507)이 있다. 최수성에게 증조가 되는 최치운은 세종이 아낀 문신으로 법의학서인 『무원록(無冤錄)』을 주석했고, 조부 최응현은 선비 정신을 중시하여 80에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중종실록』 23년 10월 28일)
숙부 최세절 또한 장원 급제한 재원으로 참판과 팔도의 관찰사를 두루 거친 인물이다. 하지만 최세절은 자리에 연연한 탓인지 무절(無節)·무상(無狀)의 아이콘이 되어 선비들의 조롱을 한몸에 받게 된다. 인물됨에 절조도 없고 볼 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에 최수성은 권간(權奸)의 농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숙부의 처지를 늘 안타까워한다.
최수성은 신사임당(1504~1551)에게 예술적 유전자를 전한 인물이다. 홀로 그림 공부를 했다는 사임당의 배후를 추적하다 보면 외당숙인 최수성을 만나게 된다. 사임당의 어머니에게 외사촌이 되는 최수성은 천부적 재능을 가진 화가로 중국 동진의 화가 고개지(顧愷之)를 능가한다는 평을 받곤 한다. 숙질(叔姪)간인 최수성과 신사임당은 생물학적 유전자뿐 아니라 생존 연대가 겹치는 15년이라는 세월과 강릉 북평촌이라는 공간적 공유를 통해 직간접적인 사숙이 이루어진 것이다.
강릉 최씨의 별장이었던 오죽헌
여기서 사임당 가(家)의 경제적 기초가 된 북평 오죽헌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죽헌은 원래 강릉 최씨의 별장이었는데, 최응현이 딸 최씨의 몫으로 상속한 것이다. 그 후 오죽헌은 최씨에서 외동딸 용인 이씨로, 다시 사임당을 비롯한 이씨의 다섯 딸에게 상속되었다. 율곡 이이의 기록에 의하면 외조모 이씨는 혼인과 함께 서울에 살림을 차렸는데, 그 어머니 최씨가 병환이 나자 바로 강릉으로 돌아와 친정에 정착한다.(‘이씨감천기’)
오죽헌의 주인으로 절대적인 위상을 가진 최씨와 그의 딸 이씨는 지성과 덕성을 겸비한 여성으로 알려졌는데, 그녀들의 계보는 사임당과 그 딸 매창으로 이어진다. 한편 오죽헌 최씨의 고모는 남편 안귀손의 죽음을 애도하는 한시 ‘도망부사(悼亡夫詞)’의 작자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29) 최씨 집안에서 나온 딸들의 성취는 그 교육적 배경을 짐작케 한다.
한편 최수성은 과거를 통한 출세의 의지보다 산수를 벗 삼아 즐기는 삶을 선택하는데, 시(詩)·서(書)·화(畵)·율(律) 모두에 뛰어난 통재(通才)이기에 가능했다.(『약헌집』, ‘원정최공행장’) 그가 세속적 가치에 회의를 품은 것은 10대 후반에 만난 스승 김굉필이 갑자사화(1504년)로 효수된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최수성이 활동한 16세기 초는 사림의 정치가 시작되는 한편 뜻있는 선비들에게는 큰 상처를 남긴 시대였다. 김굉필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며 뜻을 나눈 조광조(趙光祖)와 김식(金湜)이 사회개혁을 추진하다 화를 당한 기묘사화는 최수성을 한층 더 자연주의적 삶으로 이끌었다. 무엇보다 그를 우울하게 한 것은 조정에서 왕의 출납을 담당하는 승지 벼슬의 숙부 최세절이었다.
“아저씨는 괴롭게 왜 승지를 하십니까”
어느 날 그는 술의 힘을 빌려 숙부 집을 방문한다. “아저씨는 괴롭게 승지를 왜 하고 계십니까. 외방으로 나가 처자를 편히 살게 하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권간으로부터 숙부를 탈출시키려는 이 고언이 사단이 되었다. 기묘사화를 일으킨 남곤(南袞)과 심정(沈貞)은 그 여진을 일망타진하고자 벼르던 차에 최수성이 숙부에게 한 말이 왜곡되어 전해졌다. 말은 곧 정승 모해죄로 둔갑하고 최수성은 왕명으로 급파된 낭관에 의해 체포 압송되었다.(중종 16년 10월 16일)
왕은 “최수성이 숙부에게 사직하기를 권한 뜻을 서서히 심문하라”고 명하는데, 시간을 끌면서 더 많은 관련자를 확보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좌의정 남곤이 직접 추국에 나섰다. 숙질간의 사적 대화를 역모죄로 몰아가는 긴박한 추국장에서 최수성은 담담하게 진술한다.
“선배들이 불화하여 조정에 화가 생길 것이 두려워 숙부에게 은퇴하기를 권했을 뿐이요 다른 뜻은 없었소.”(『기묘록보유』 ‘최수성전’) 붙들려 온 닷새 만에 최수성은 참형에 처해지는데, 사건의 진실과는 무관한 판결이었다. 그는 조작과 무고에 의한, 신사무옥(辛巳誣獄) 100여 명의 희생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최세절은 “조카가 나에게 은퇴하기를 권하여 물러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이 화를 보게 되었다”며 자책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여러 얘기로 변주된 ‘억울한 죽음’
이 억울한 죽음은 대중의 분노를 불러와 이야기의 형태로 재생되는데, 숙부 최세절을 악인으로 몰고 가는 방식이었다. 최수성이 희생된 후 최세절도 잠시 곤욕을 치르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으로 복귀하면서 부제학과 각 도 관찰사를 두루 거친다. 그가 새로운 관직을 받을 때마다 조정에는 ‘조카 팔아먹은 자’로 조롱하는 무리가 있었다.
대개 이런 식의 이야기였다. “조카에게 직언을 많이 받은 최세절은 마음속으로 싫어하여 조카를 제거할 마음을 품었다. 최수성이 난폭한 말을 했다며 몰래 심정(沈貞)의 처소에 알려 대죄(大罪)에 빠뜨렸으니, 매우 참혹하다.”(『중종실록』 28년 3월 22일)
그런데 숙질간의 사적 대화가 어떻게 역모죄로 둔갑할 수 있는가. 이에 응답하듯 사실과 소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야기들이 풍성하게 진열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최수성의 그림 품격을 흠모하던 남곤은 그 숙부에게 부탁하여 8폭짜리 그림을 얻게 된다. 최수성은 남곤에게 주는 그림에 ‘낙엽장추학(落葉藏秋壑)’과 ‘잔월조반산(殘月照半山)’라는 문장이 든 시를 적어 넣었다. 즉 바람에 휩쓸려 다니는 지조 없는 선비들을 풍자한 내용이다.
이로부터 남곤은 최수성을 미워하게 되었고 호시탐탐 해칠 기회를 엿보았다. 이런 정보가 축적되면서 ‘원정 최수성이 그림으로 남정승을 풍자한 이야기’라는 제목의 소설 ‘최원정화풍남태설(崔猿亭畵諷南台說)’로 탄생한다. 소설에서는 최수성이 죽지 않고 살아나는데,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다. 이는 사실적 텍스트와 문학적 이야기를 조합하여 감성과 희망이 살아있는 세계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비루하게 안 살겠다” 500년 전 울림
숙부에 대한 고언이 왜곡되면서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었지만 최수성 그 삶의 이야기들은 기록 곳곳에서 전해온다. 그는 시를 사랑하여 시인으로 영원히 남을 사람이었고, 세태를 풍자한 시를 곧잘 지어 벗들을 웃겨 주었던 호방하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그가 붓을 잡아 벽에다 산수를 그리면 벗들은 시를 짓고 음률을 고르고 춤을 추었다.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보면 최수성은 시와 그림과 거문고로 모임의 격조를 주도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비루하게 살지 않겠다는 결기를 실천으로 보여준 삶이었다.
최수성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열망으로 시호(諡號) 문정(文正)과 영의정에 추증되는 쾌거를 이룬다.(인종 1년) 또 손자뻘인 율곡 이이의 계청으로 국불천위(國不遷位)의 제사가 내려졌다.(선조 11년) 그런데 세속적 영화를 멀리하며 자신만의 길을 낸 그가, 그의 영혼이 불천위나 영의정이라는 세속의 최고 가치를 흔쾌히 받을지는 의문이다. 후손과 고을의 끊임없는 기억으로 재생되어 온 원정 최수성, 500년이 지난 오늘도 올곧은 선비의 좌표가 되고 있다.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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