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생물백과사전 <자산어보>가 탄생한 마을

황호택 2023. 12. 14.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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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의 보석, 신안 천사섬 17] 흑산도③ 실학 명저의 탄생지, 사리마을

신안군에는 1004개의 섬이 있다. 1004는 날개 달린 천사다. 신안군은 천사 조각상 1004개를 세우고 있다. 섬 하나에 천사가 하나다. 그 섬들에 가면 생명이 꿈틀대고 역사가 흐르며 자연이 숨 쉬고 낭만이 넘실댄다. 미래의 역사·문화·환경 자원으로 각광 받는 신안 1004섬. 그 매력을 새롭게 만나는 연중기획을 시작한다. 황호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겸직교수와 이광표 서원대 교수가 매주 1회 집필한다. <기자말>

[황호택]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1758~1816)의 첫 유배지는 흑산도가 아니라 우이도였다. 그 시절에는 지금의 흑산도를 대흑산도라 불렀고, 우이도는 흑산도 또는 소흑산도라고 했다. 같은 흑산도권이어서 유배인들은 우이도와 흑산도 중에서 유배지를 선택할 수 있었다.

1801년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을 시작한 손암은 1805년 여름 흑산도로 옮겨갔다. 손암은 우이도에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생계가 어려워지자 인구가 많은 흑산도에서 서당을 열면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흑산 바다를 건너갔다.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흑산도로 둘째 큰아버지(손암)를 찾아간 이야기를 담은 기행문 <부해기>(浮海記)에 따르면 손암은 흑산도에서 처음에는 수군진(水軍鎭)이 있던 진리(鎭里)에 머물다가 얼마 안 돼 사리로 옮겼다.
 
 작은 섬들이 방파제 노릇을 하는 사리 포구.
ⓒ 황호택
   
손암은 진리를 마다하고 왜 11km나 떨어진 사리마을로 갔을까.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골짜기에 들어선 사리마을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없어서 주민 대부분이 어업 활동으로 살아가는 곳이었다. 사리마을은 지금도 여전히 산비탈에 밭뙈기만 있고 논이 없다.

사리마을 주민들은 아이들의 학채(學債)를 해산물로 물납(物納)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부들은 희한한 고기가 잡히면 가져와 보여주었다. 손암은 물고기의 이름을 잘 모르는 터라 이러한 무지를 깨쳐야 하겠다 싶어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리 포구는 7개의 섬이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는 천혜의 포구다. 해녀의 아들 7형제가 바다에 들어가 두 팔을 벌려 파도를 막아 7개의 작은 섬들로 굳어졌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사리는 흑산도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해변 마을이다. 손암은 사리 포구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돼 눌러살 결심을 한 것 같다.

해양생물백과사전 <자산어보> 서문에는 '흑산 바다에는 어족(魚族)이 매우 번성했으나 이름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 널리 섬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계보(系譜)를 만들 생각을 하였는데 사람마다 각자 말이 달라 그대로 따를 수가 없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처럼 어보(魚譜)를 쓰려고 사리마을에 간 것이 아니라 어촌에 살다 보니 연구와 집필 의욕이 솟아났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학채로 받은 물고기 이름 알려다 집필

사리마을이 한눈에 들어오는 산비탈에 약전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사촌서당(沙村書堂)이 복원돼 있다. 다산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나오는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에 따르면 약전은 1807년 초가 두어 칸을 지어 놓고 어린 아이들 대여섯 명을 가르치며 사촌서실이라고 이름지었다. 사리마을의 사촌서당(沙村書堂) 편액은 동생 약용의 글씨에서 집자(集字)했다.
 
 복원된 사촌서당. 강한 바닷바람을 막는 사리마을의 담장은 성곽 같다.
ⓒ 신안군
   
손암이 사리마을에 서당을 연 지 151년 만인 1958년 사촌서당 유적지 앞에 천주교 공소가 세워졌다. 정약전에 대한 천주교의 애정이 깃들인 공소다. 공소 앞에 큰 우물이 있는 것이 이채롭다.
공소 초창기에 옛 물길을 찾아내 우물을 파고 마을 주민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했다. 사리마을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 우물을 사용하고 있다. 우물 옆에 마리아상이 서 있다. 갈릴리 호수로 가는 길에 있는 '처녀의 샘'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리아의 우물을 연상시킨다.
 
 사리공소의 우물과 성모상.
ⓒ 황호택
 
형태는 흑산도 본당 건물과 흡사하다. 철골을 사용하지 않고 바닷가에 흔한 몽돌로 벽체를 쌓았다. 당시 사리마을에는 36세대 109명의 신도가 있었다. 공소와 사촌서당 옆에 돌담으로 둘러싸인 야생화원이 있다. 구절초 말나리 비비추 원추리 흰머위가 철에 따라 꽃을 피운다.
등록문화재인 사리마을 옛 담장은 돌담 밑이 넓고 위가 좁은 형태로 마치 작은 성처럼 견고하고 높게 축조돼 있다. 작은 호박돌과 길고 평평한 돌을 교차해 쌓아 올려 거센 바닷바람에도 버틸 수 있다. 손암의 동상은 돌담길 앞에 서서 호수처럼 잔잔한 사리 포구를 바라보고 있다.
 
 사리마을 유배문화공원에는 정약전 최익현 등 유배인들의 비석이 있다.
ⓒ 신안군
 
유배문화공원에는 정약전 최익현 등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한 인물들의 이력을 새긴 비석들이 있다. 주민들이 일부 유배인들의 비석을 깨뜨려 한쪽 구석에 쌓아둔 것이 보인다. 파렴치한 죄를 저지른 유배자들의 비석까지 세워줄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최익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적지 대마도에서 옥사한 애국지사다. 사리마을에서 저수지 가는 길에 지장암이라는 바위가 있고 '箕封江山 洪武日月(기봉강산 홍무일월)'이라는 최익현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기봉강산'은 중국인 기자가 만들어준 나라가 바로 조선이고, '홍무일월'은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의 해와 달이 조선을 비춘다는 의미다. 조선의 우국지사로 추앙받는 조선 선비들이 소중화(小中華) 의식에 빠져 있음을 보여주는 암각문(巖刻文)이다.

<자산어보>는 어류 101종을 포함해 227종의 수중 생물을 비늘이 있는 종류[鱗類], 비늘이 없는 종류(無鱗類), 딱지가 있는 종류(介類), 기타 바다생물인 잡류(雜類)로 나누었다. 1814년에 출간된 <자산어보>는 흑산도 주변에서 발견되는 약 220여 종의 해양동식물을 거의 망라했다. 자산어보의 상어 편을 보면 눈에 보이지 않는 상어의 몸속 구조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무릇 알에서 태어나는 물고기는 암수가 교미하지 않고 수컷이 먼저 흰 액(정액)을 쏟아내면 암컷이 정액에 알을 낳아 새끼가 부화한다. 유독 상어라는 것만은 새끼를 낳는데, 새끼를 낳는 때가 정해진 때가 없으니 물에 사는 동물 중에서도 특별한 사례다.
수컷은 외부에 생식기가 두 개 있고, 암컷은 자궁 두 개가 있으며 자궁 안에 각기 4~5개의 태(胎)가 만들어지는데 태가 성숙하면 새끼를 낳는다. 새끼 상어는 가슴 아래에 각기 알 하나씩을 품고 있는데 크기는 수세미 열매 만하며, 알이 사라지면 새끼를 낳는다.

<자산어보>의 원제(原題) <해족도설>은 그림을 곁들인 백과사전을 쓰려는 구상에서 나왔다. 다산은 물고기에 관한 <해족도설(海族圖說)>을 쓴다는 형(손암)의 편지를 받고 "그림의 형상은 어떻게 하시렵니까"라고 묻고는 "글로 쓰는 것이 그림으로 그리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라고 자문자답(自問自答)했다.
 
 약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축수도(畜獸圖)
ⓒ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약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화접도(花蝶圖).
ⓒ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은 손암 작품으로 전해지는 사실주의(寫實主義) 화풍의 그림 두 점을 소장하고 있다. 낙관에 십자가를 진 사람의 문양이 들어 있다. 작품 수준이 높아 손암이 <자산어보>에 물고기 그림을 덧붙였더라면 과학과 예술의 뛰어난 합작품이 태어났을 뻔했다. 그래서 "그림은 그만두고 글로 쓰라"는 다산의 조언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자산어보>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해부학적 지식을 담고 있다. 말미잘이나 불가사리같이 먹지 못하는 생물의 경우에도 내부구조를 묘사한 것을 보면 과학적 연구를 위해 해부를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손암이 생선을 해부해서 내장을 끄집어내 관찰하는 모습을 보고 주민들은 미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 우이도에 전해 내려온다.

<자산어보>에는 상어와 인간이 벌이는 혈투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상어가 주낙에 걸려 올라오면 삼지창으로 찔러 작살에 낚싯줄을 묶어놓고 요동을 치며 달아나도록 내버려 두고 지치기를 기다렸다가 끌어당겼다. '가끔 상어가 낚싯바늘을 물고 달아나는 경우가 있는데 낚싯줄에 손이 잘리거나, 허리에 감기면 온몸이 물속으로 딸려 들어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사리마을 돌담길에서 사리포구를 바라보는 정약전 동상.
ⓒ 황호택
  
손암은 바닷속 어류들의 생태를 기록하기 위해 사리마을의 '인어'들과도 소통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족들의 바닷속 생태가 세밀하게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정학유의 <부해기>는 '한 여인네가 머리를 풀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바다에 떠서 가곤 했다… 피부가 검어서 예쁘게 보이지는 않았다'라고 사리마을 해녀들의 물질을 인어(人魚)에 비유하며 묘사했다. 정학유는 농촌의 세시 풍속과 교훈적인 내용을 담은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의 작자다. 한가한 마음에 해녀의 가슴과 인물평을 글에 담은 것 같다.

해녀들에게 물은 바닷속 어류 생태

흑산도는 윤기 나는 검푸른 상록수로 뒤덮여 산이 검게 보여 흑산도(黑山島)로 불리게 되었다. 약전 약용 형제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유배의 섬 흑산(黑山)이 주는 컴컴한 이미지가 싫어 흑산 대신에 '玆山(자산)'이라고 썼다.
 
'자산(玆山)'은 흑산(黑山)이다. 나는 흑산으로 유배되었는데, 흑산이라는 이름이 컴컴하여 두려우니 가족들의 편지에서 번번이 자산이라고 하였다. '자' 역시 검다는 말이다. - <자산어보> 서문
 
자(玆)는 '이것'이라는 뜻과 '검다'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자산(玆山)은 흑산이면서 동시에 손암의 또 다른 호다. 다산은 형이 쓴 산림에 관한 글을 <자산필담(玆山筆談)>이라고 불렀다. <자산어보>는 곧 <흑산어보>이고 더 풀자면 '정약전이 쓴 흑산 어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자산어보>를 <현산어보>로 읽어야 한다는 독음(讀音) 논쟁은 한문학계에서도 <자산어보>의 판정승으로 결론이 났다.

당대 유학자들이 공자 맹자나 삼강오륜만 논하고 있을 때 실학자인 손암은 섬마을에서 해족(海族)을 관찰하고 해부하며 해양생물백과사전을 편찬했다. 사리마을은 실학 명저의 탄생지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신동원, <다산은 현산어보가 아니라 자산어보라 불렀다>, 《역사비평》 vol., no.81, 2007 이태원 저, 《현산어보를 찾아서 1》 청어람미디어, 2020 정약전 저/권경순 김광년 옮김, 《자산어보(玆山魚譜)》, 더스토리, 2022 최성환, <섬사람들의 벗이 된 흑산도 유배인 정약전>, 《해양담론》 제4호, 2017 《KBS 역사스페셜-조선시대, 최신식 어류백과사전이 있었다》, KBS 2003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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