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이 준비해도 불안하다면 들어볼 만한 조언

김성호 2023. 12. 1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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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독서만세 206] 알랭 드 보통 지음 <불안>

[김성호 기자]

바야흐로 불안의 세기다. 입시와 입사, 결혼, 육아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의 문턱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음이 들려온다. 반세기 넘게 이어진 안정된 사회질서가 그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는 분석이 줄을 잇는다.

서울 합계출산율은 0.59를 기록해 세계 최저를 기록했고, 전국 평균 또한 0.7명대로 인구소멸이 코앞으로 닥쳐왔음을 실감케 한다. 누군가는 저출산이 사회적 자살이라고 칭한다. 지난해 말 드디어 80억 명을 넘어선 폭발적 인구증가 속에서 유독 한반도에선 인구가 고꾸라질 징후가 역력하게 드러난다.

이와 연관해 볼 수 있는 지표가 또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자살률이다. 이미 유명한 이야기지만 한국은 소위 선진국 지표로 볼 수 있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소속 국가 가운데 자살률 최상단에 올라 있다. 지난 20년 중 18년 동안 자살률 1위를 기록했을 정도다. 한 해 평균 1만30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아이를 낳지 않는 사회적 자살행위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실제적 자살행위가 한국에선 실시간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드높은 자살율과, 바닥을 모르고 추락하는 출산율 뒤엔 제 미래조차 장담할 수 없는 불안한 삶이 있다. 혹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에도 아이를 낳고 삶을 꾸려갔음을 지적하며 오늘의 한국인이 나약하다 말한다. 꼭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도 없는 일이겠으나 오늘의 현상을 오늘의 잣대로 분석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다. 대체 왜 이 시대 한국인은 아이를 낳지 않는가. 대체 왜 이 시대 한국인은 스스로를 죽이는가.
 
▲ 불안 책 표지
ⓒ 은행나무
 
가치가 사라진 시대, 불안만이 남았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2023년 한국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서점가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 있는 도서 목록을 보면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돈을 많이 버는 것, 남보다 위에 서는 것 말고 남아 있는 가치가 없는 듯이 보이는 얄팍하고 천박한 사회가 우리가 사는 한국의 현실이다. 과거 어느 시대보다 많은 자산을 갖고 기술을 누리면서도 조상 대대로 맡아온 역할을 더는 해낼 수 없겠다고 호소하는 시대가 우리 가운데 활짝 열렸다.

책은 그 근간에 무엇이 있는지를, 미래를 스스로 열어젖히지 못한 채 닥쳐올지 모를 위험의 가능성에 몸을 떠는 이유를 설명한다. 책은 자본주의와 성과주의,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개인이 겪을 밖에 없는 불안을 다룬다.

보통의 전작들과 달리 개인의 차원을 넘어 사회와의 접점을 탐구하며, 지극히 현실적 문제로 이어지는 불안의 원인과 해법을 서술한다. 책이 겨냥한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격렬하게 표출되는 국가가 한국이란 점에서, 또 그 불안이 한국의 명운을 좌우할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독자가 이 책을 집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 하겠다.

책의 구성은 간명하다. 전반부에선 불안이 태어나는 원인을 진단하고, 후반부에선 이를 다룰 해법을 소개한다. 원인은 1.사랑결핍, 2.속물근성, 3.기대, 4.능력주의, 5.불확실성이다.

우선 책은 사람들이 어떤 지위를 구하려는 근본적인 이유를 탐구한다. 통상 돈과 명성, 영향력의 증대 등이 그러한 갈망의 이유로 꼽힌다. 보통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 같은 이유 아래 깃든 진짜 원인을 탐구한다. 그렇게 도달한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들이 부와 권력, 명성을 추구하는 이유가 최저임금으로도 구할 수 있는 생활필수품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날보다 훨씬 열악한 사회에서, 노예며 농노조차도 평안하고 만족하는 삶을 살았음을 통하여, 오늘날의 불만족과 불안의 배경을 추적한다.

인간은 왜 불안에 휘둘리는가

사랑, 혹은 인정의 결핍은 오늘날 인간의 문제임에 분명하다. 과거 노예와 농노가 노예와 농노로서 제게 필요한 인정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오늘의 시민은 그를 획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모든 것이, 심지어는 자수성가하여 수천 억 원 대 자산가나 톱스타, 대통령이 되는 일조차 가능한 이 시대엔 평범한 시민이 제 상황에 만족하기 어렵다.

주변인들은 더 나은 경지에 오른 이에게 환호하고 못한 처지의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고, 관심을 쏟고, 공감 어린 표정으로 제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상황을 위하여 사람은 더 큰 성취에 매달린다는 것이 보통의 분석이다.

인간 자체가 타인으로부터 낫다는 인식을 갖고 싶어 하는 속물근성에 취약하다는 지적 또한 설득력이 있다. 임대주택 주민을 비하하는 용어에서 보듯이 한국사회에서도 흔히 발견되는 속물근성을 보통은 서구의 역사 가운데서 여럿 찾아 소개한다.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을 지경인 사람들은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우리가 사귈 만한 사람들은 오직 우리와 사귀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뿐이란다!"

1892년 <펀치>에 실린 만화 속 대사는 시대를 뛰어넘어 이어지는 속물근성의 전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 처지에 만족했던 조상들의 시대와 달리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된 오늘의 현실, 불평등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지난 세기와 달리 평등이라는 인식이 기본값으로 자리해 불평등을 인정할 수 없게 된 상황 또한 불안의 이유로 지적된다.

여기에 더하여 가난이나 실패가 개인의 열등함과 역량부족에 따른 것이라는 능력주의의 인식, 한국 출판가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천박한 자기계발서의 범람, 여기에 더하여 급변하는 사회상이 내포한 불안정성도 불안의 이유가 된다.

멈출 수 없는 불안, 이렇게 맞서야

보통은 고유라고 해도 좋을 박식함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례를 살펴가며 불안의 이유를 진단한다. 19세기 중반에 꽃을 피운 자기계발서의 역사를 읽다보면 근래 한국 서점가에서 흔히 보이는 온갖 인생공략집이니 청춘지침서니, 자기계발서, 재테크 서적 아래 자리한 민망한 시대정신을 마주하게 된다. 이와 같은 책에 앞서 <불안>을 필독을 추천할 밖에 없는 일이다.

책은 해법 또한 흥미롭다. 통상 많은 인문학 책이 시대의 문제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데서 그칠 뿐 해법은 모호하게 두는 데 반해 <불안>은 상당히 깊이 있는 시각으로 해법을 제시한다. 해법은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1.철학, 2.예술, 3.정치, 4.기독교, 5.보헤미아다. 목차에서 예상할 수 있듯, 해법은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소개하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을 소개하는 대목은 과연 주목할 만하다. 흔히 삶에 대한 비관 쯤으로 오해되곤 하는 염세주의는 가치의 복원, 또 자아의 회복을 이야기하는데 효과가 있는 철학이다. 이를 이해한 보통은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해두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피상적이고 하찮다는 것, 그들의 시야가 편협하다는 것, 그들의 감정이 지질하다는 것, 그들의 의견이 빙퉁그러졌다는 것, 그들의 잘못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점차 그들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중략)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165p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이 참 군자"라고 한 공자의 가르침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할 것이다. 스스로가 가치판단의 주체가 되고, 타인과 세상의 잣대로 제 삶을 재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되겠다.

세상의 잣대가 아닌 나 자신으로 살라

스스로가 뛰어난 존재이며 그 역량으로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는 인식에 대한 대응으로는 예술이 효과가 있다. 예술은 기존의 인식을 전복시키고, 누구나 실패와 절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훌륭한 예술은 사람의 가슴을 열어젖혀 공감과 겸손의 마음을 일깨울 수 있다는 게 보통의 판단이다. 비록 매 순간 예술이 승리하진 못하지만 적어도 어느 순간 어느 작품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테다.

보통은 또한 오로지 물질적 성취만이 인간의 위대함이 아님을 정치가 일깨울 수 있다고도 말한다. 한국은 물론 세계 각국의 현실정치를 떠올릴 때 지극히 이상적인 주장일 수는 있겠으나, 현명한 자들이 바람직한 이성과 감성으로 더 나은 다스림을 구상하는 정치라면 그와 같은 선기능이 이뤄질 수는 있을 테다.

마침내 세상은 폐허가 될 것이며 영원한 것은 신적인 존재뿐이라는 기독교, 나아가 종교적 인식 또한 불안을 극복할 수 있는 단서가 되어준다. 물질적 성취를 자유로움과 조롱의 정신으로 우회하는 보헤미아적 태도도 대안이 될 수 있다. 이 모두가 충분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는 없겠으나, 적어도 사람이 저 자신의 사상과 철학으로 불안에 대응할 수 있다는 인식 만큼은 책 전반에 걸쳐 명확하게 드러난다 하겠다.

그럼에 <불안>의 핵심은 세상의 잣대가 아닌 스스로의 철학과 사상, 판단으로 삶을 꾸리라는 지적이다. 보통은 역사적 사실을 비롯한 충분한 사례를 바탕으로 이러한 자세가 불안에 대한 가장 적합한 대응이란 걸 논증하고 있다. 인간이 정말로 필요한 만큼만 불안한가를 돌아본 적 있는 이라면, 보통의 지적이 시의적절하고 의미 깊다는 사실에 동의할 밖에 없을 테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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