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렬의 시시각각] 1876조원 가계부채, 망각과 왜곡
1876조원의 가계부채(지난 3분기 말 현재)는 한국 경제의 급소다.
2020년 3분기 말부터 국내총생산(GDP)의 100%를 넘었다(국제결제은행 자료). 이런 나라는 호주·스위스 등 극소수다. 미국 73.7%, 독일 53.5%, 영국 80.7%다(지난 2분기 기준).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 비율이 80%를 넘어서면 성장률이 낮아지고 경기 침체 확률이 높아진다. 빚이 많으면 이자 내랴, 원금 갚으랴 소비할 돈이 줄어든다. 이는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로 확인된다. 한은 추산 국내 가계대출자의 평균 DSR은 2분기 말 39.9%에 이른다. 소득의 상당 부분을 빚 원리금 갚는 데 쓰는 셈이다. 빚에 짓눌려 소비가 위축되고, 이것이 성장률을 끌어내린다는 얘기가 그래서 나온다. 그렇다고 금리를 내리면 가계부채가 늘고, 올리면 대출자들이 나가떨어진다. 진퇴양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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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 빚,GDP 100% 넘어 경제 위협
문 정부 부동산 실정에 크게 늘어
독한 각오로 ‘빚과의 전쟁’ 벌여야
」
우리 국민은 원래 빚에 엄격했다. 1990년대만 해도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40%대였다. 저출산이 그러하듯 가계부채도 어느 날 갑자기 늘어난 게 아니다. 역대 정권마다 책임이 있다. 그래도 폭등했던 특정 시기가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가계부채는 약 500조원 늘었다. 다른 정권을 압도했다. 물론 코로나 사태라는 변수가 있었다. 한은은 금리를 확 내렸다. 0%대 금리가 1년 반 이상 지속했다. 전 세계가 초저금리였다. 각국 정부도 돈을 풀었다.
하지만 유달리 한국의 가계부채가 많이 늘었다. 규제로 시장을 잡겠다는 부동산과의 전쟁이 가계부채 급등의 방아쇠를 당겼다. 문 정부 전반기 부동산 정책 사령탑이었던 김수현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적기에 더 강한 대출 규제와 가계부채 관리에 나서지 못했던 것이 가장 중요한 부동산 실패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부동산과 정치』).
그러나 전후 관계 해석에 오류가 있다. 한은과 금융 당국이 대출 수도꼭지를 너무 느슨하게 조여서 집값이 치솟은 게 아니라 부동산 폭등이 차입 폭발을 초래한 것이었다. 금융 당국은 15억원 초과 아파트 주택담보대출 금지 등 강경한 대출 억제책을 쏟아냈다. 그래도 부동산 벼락거지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대출을 받는 ‘영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저금리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의 위험성을 가렸다. 코로나가 끝나고 금리가 뛰어오르자 부채의 무서움이 현실로 다가왔다. 문 정부의 탈원전 후유증이 현 정부로 넘어온 것처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실정(失政)은 잊히고, 정치는 실정의 책임을 왜곡하고 떠넘긴다. 내년 4월 총선은 경기 침체와 가계부채 책임 공방으로 뜨거울 것이다. 지난 정기국회에서 그 전조가 드러났다. 문 정부 시절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정책 당국자들을 추궁했다. 양경숙 의원은 이창용 한은 총재에게 “대다수 국민이 부채 지옥에서 허덕이고 있는데 중앙은행 총재는 도대체 뭘 하고 있나”라고 했다. 급기야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정말 이 말씀까지 드리고 싶지 않지만, 지난 정부에서 엄청나게 부동산 규제를 했는데 그때 가계대출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반박했다. 팩트는 김 위원장 말이 맞다. 현 정부에서 가계부채는 약 13조원 증가했다.
실정은 지나가고 빚더미는 남았다. 이창용 총재는 “기업부채는 구조조정으로 줄일 수 있지만, 가계부채는 그게 어렵다”고 토로한다. 무작정 빚 탕감을 할 수도 없다. 박춘섭 신임 경제수석은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80%까지는 떨어져야 하지 않나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계 빚을 단기간에 줄일 묘수는 없다. 네덜란드는 가계부채 비율을 100% 밑으로 낮추는 데 18.5년, 덴마크는 17.7년 걸렸다. 길고 고통스러운 ‘빚과의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 가계는 오랫동안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 그 사이 거대 부채의 씨앗이 어떻게 뿌려졌는지는 잊힐지 모른다. 그러나 기억해야 나쁜 정책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기억이 힘이다.
이상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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