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마지막 그린 '노량', 실제 역사와 비교해 보니
[김종성 기자]
6년 7개월 전의 그 일본군이 아니었다. 오는 20일 개봉될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이하 '노량')의 소재인 노량해전은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의 사건이다. 이날의 일본군은 부산에 처음 상륙한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의 그 왜군이 아니었다. 이때의 일본군은 한시라도 빨리 고향 땅을 밟고 싶어 하는 군대였다.
이들은 1년 4개월 전의 일본군과도 달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1596년에 내린 재출병 명령에 따라 1597년 8월 중순(음력 정유년 7월 초순)에 정유재란을 도발했을 때의 그 왜군과도 달랐다. 이미 기가 꺾인 군대였다는 뜻이다.
▲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 이미지. |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1598년 12월 16일 해 뜨기 전에 지금의 경남 하동군과 그 남쪽 바다에 있는 남해군을 가로지르는 노량해협에 일본군이 출현했다. 이들은 갈길이 바쁜 군대였다. 이들에게 전투 승리는 부차적인 목적이었다. 영화 <노량>에서 배우 백윤식이 연기한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노량해협 서쪽 건너편인 전라도 순천에 가서 고시니 유키나가 군대를 구출하기 위함이었다.
일을 빨리 처리하고 하루속히 귀향하고 싶어 하는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것이 이순신의 판단이었다. 그가 그런 마음을 가진 것은 특유의 사명감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 전쟁으로 인한 개인적 상처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노량>에서도 묘사되듯이 이순신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아들 이면을 잃었다. 이면이 전사한 것은 노량대첩 1년 전이다. 1597년 11월 22일(음력 10월 14일) 새벽 1시경, 이순신은 꿈에서 아들을 봤다.
영화 <노량>에서는 이 순간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개울가에서 일본군을 홀로 상대하다 죽어가는 아들을 향해 이순신이 물속을 헤집으며 달려가다가 악귀들에게 붙잡히는 장면으로 말이다. 하지만 <난중일기>에 나오는 이순신의 꿈은 이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위 날짜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은 "말을 타고 언덕 위로 가다가 말이 발을 헛디뎌 냇물 가운데로 떨어졌으나 거꾸러지지는 않았다"라며 "막내아들 면을 붙잡고 안은 형상이 있는 듯하다가 깨었다"라고 꿈을 묘사했다. 말을 타고 가다가 언덕 밑으로 떨어져 보니 자신이 아들을 붙잡고 안은 채로 말 위에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은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고 썼다.
그날 저녁 이순신에게 편지가 배달됐다. 천안에서 온 서신이었다. 겉면에 '통곡'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였다"고 이순신은 일기에 썼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시 못하신고"라고 하늘을 원망하며 엉엉 통곡을 했다. 닷새 뒤 일기에도 꿈에 고향집 하인을 보고 아들이 생각나 통곡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아픔 역시, 일본군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이순신의 의지에 반영됐으리라고 볼 수 있다. 바다의 총지휘자인 이순신이 그런 마음으로 해전에 임했으니 노량 앞바다는 더욱 더 '죽음의 바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 이미지. |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영화 '노량'의 진린(정재영 분)은 처음에는 전투를 관망하다가 이순신의 분투에 감동돼서, 일본군의 공격으로 목숨이 위험해져서, 자신을 구출하는 조선군의 마음에 감동돼서 나중에는 목숨을 걸고 싸운다.
실제의 명군도 그 정도로 치열하게 싸우지는 않았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점은 3국 군대의 인명손실 규모로도 반영된다.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의 <이순신 평전>은 "노량해전에서 일본 군선 200여 척을 분멸하고 나포한 군선도 100여 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일본군도 1만 5000명에서 2만여 명은 살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 뒤, 이렇게 설명한다.
"진린 휘하에서는 노장 등자룡 외에 부장 진잠(陳蚕)의 중군(中軍)인 도명재가 전사한 것이 유일하게 확인된다. 이외에 명나라 수군을 이끌고 참전한 장수들 중에는 부상을 입거나 전사한 이가 없다."
'노량'에서 배우 허준호가 연기한 등자룡은 마치 이순신의 전우나 되는 것처럼 열심히 싸운다. 이는 일본 전함 300여 척을 격침하거나 나포하고 일본군 1만 5천 이상을 전사시킨 주역이 조선 수군이었음을 의미한다. 숫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이 그런 성과를 거둔 사실은 이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투했는지를 웅변한다. 나라에 대한 사명감과 아들을 잃은 원통함 등으로 무장한 이순신뿐 아니라 조선인들 전체가 죽을 각오를 다해 싸웠던 것이다.
'죽음의 바다' 된 노량
'노량'에서는 제대로 강조되지 않았지만, 이 전투의 치열함은 일본군의 엉뚱한 실수로도 방증된다. 동쪽에서 노량해협에 진입한 일본군은 조·명 연합군의 화공으로 타격을 받게 되자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는 노량해협 서쪽 건너편의 순천을 향하지 않고 배를 남쪽으로 돌렸다. 남해도를 돌아 큰 바다로 빠져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남해도를 돌아 바다로 나가려면 이 섬 남단까지 배를 몰고 가야 한다. 서쪽으로 항행하며 남해도 북단을 돈 뒤 얼마 되지 않아 커브길이 나타났다. 그러자 일본군은 그곳이 섬 남단인 줄 알고 좌회전을 했다. 그런데 그곳은 남해도 서북단의 관음포였다. 움푹 패인 만(灣)을 보고 바다로 착각했던 것이다. 막다른 길목을 스스로 찾아간 셈이다.
6년 전부터 조선 해안에서 전쟁을 벌인 일본군이었다. 그중 일부는 임진왜란 이전에 왜구의 일원으로 한반도 주변을 다녔다. 그런 군대가 일본과 가까운 한반도 남해안에서 만을 바다로 착각하고 '핸들'을 왼쪽으로 꺾은 것이다. 정상적인 판단이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혼란스러웠다는 방증이다. 이는 일본군이 결사항전 각오로 임함으로써 전투가 한층 더 치열해지는 원인이 됐다.
▲ 영화 <노량: 죽음의 바다> 스틸 이미지. |
ⓒ 롯데엔터테인먼트,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
반나절 되는 그 시간 동안에 조선군과 명나라군은 물론이고 일본군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장선에 탄 이순신의 동태를 수시로 관찰했을 일본군도 낌새를 채지 못했던 것이다. 이순신 참모들이 사령관의 전사를 잘 숨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전투가 치열해 상황을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군 입장에서 보면, 적장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전투하는 시스템이 작동될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 전투에 임하는 조선 수군과 이순신의 각오는 남달랐다. 일본군의 총칼에 혈육의 숨이 끊어지고 자기 땅이 황폐해지는 광경을 1592년부터 1598년까지 6년간이나 경험한 뒤였다. 그래서 그들은 단 하나의 일본군도 그냥 돌려보낼 수 없다는 각오를 품고 있었다. 일본군이 나중에 돌아올 가능성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는 순천에서 발이 묶였고, 그 부대를 구출하고자 일본 전함 500여 척이 출동했다가 노량 해협에서 벼락을 맞았다. 조선군과 이순신은 이곳을 일본군의 '죽음의 바다'로 만들었다. 불행히도, 이순신과 일부 수군 장병들에게도 이곳이 '죽음의 바다'가 됐다.
이순신이 전사한 뒤 반나절 동안 조선군은 사력을 다해 싸워 노량해전뿐 아니라 임진왜란 자체를 승전으로 장식했다. 일본 대군이 조선에 다시 상륙한 것은 1894년 동학혁명 때다. 그때까지의 296년 동안 일본군은 한국을 침공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막판 노량해전에서 보여준 조선 수군과 이순신의 투혼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결과라고 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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