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백남준은 왜 한국을 떠났을까

김상목 2023. 12. 13.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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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김상목 기자]

'박제'가 되어버린 백남준을 실체화하려는 모험

'백남준'이라는 이름은 그저 세 글자로 끝나지 않는 울림을 지닌다. 현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인물이라는데 별 이견이 없을 테다. 하지만 정작 그의 이름 말고 3줄 정도로 백남준에 대해 언급해보라 한다면 과연 우리는 얼마나 그에 대해 논할 수 있을까. 1932-2006년 사이 이 지구상에 존재했던, 그리고 현대미술과 대중문화에 무수한 족적을 남긴 것은 물론, 경기도 용인에 본인의 이름을 붙인 아트센터가 존재하는 데다 해외는 물론 국내 유수의 미술관과 공공기관에 백남준의 작업이 전시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마치 누구나 존재 자체는 인지하지만 실체에 대해선 안개 속에 감춰진 존재인 것과 같다.

그러고 보니 이 현대미술 거장의 이름값에 비해 당연히 있을법한 전기영화도 통 보이지 않는다. 현대인이다 보니 상세한 기록과 자료가 남아있는 것은 물론, 신비주의나 비밀스런 사생활 보호 같은 게 별로 없는, 거의 대부분의 생애가 공개된 것과 매한가지인 현대미술가 치고는 무척 기이한 경우임에 틀림없다. 현대 예술을 다룬 타 거장들의 기록영화에서 그의 이름이 간간이 언급되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정작 한국이 배출한 예술가 반열 중에서도 한 정점에 있는 백남준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한편 본 적이 없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의 작품세계와 경향을 중심 제대로 잡아 압축적으로 소개하는 과제가 극도로 지난한 탓이 클 테다. 그리고 워낙 당대의 수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작업하다 보니 무수한 저작권과 상영동의 문제도 풀기 힘든 숙제였을 것이다. 그렇게 막연한 의문만 품고 있던 끝에 마침내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라는 제목으로 한국계 감독 어맨다 킴,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친숙해진 재미교포 배우이자 감독인 스티븐 연 등의 협력에 의해서 말이다.

우리는 백남준을 한국 출신 유학파로 성공한 세계구급 예술가 정도로 이해한다. 특히 TV 모니터를 잔뜩 늘어놓고 비디오를 활용한 미디어아트로 유명해진 작가로 간주할 법하다. 아마 적지 않은 이들이 백남준 하면 그의 얼굴과 함께 TV를 떠올릴 테다. 하지만 그가 그저 일반인은 범접하기 힘든 현대예술가 중 성공한 일인 정도로 취급된다면 단연코 거대한 오독의 결과라는 것을 이 영화는 시작부터 설파하기 시작한다. 혁명적 예술가이자 인류의 미래를 전망하는 '선지자'에 대한 부당한 스테레오 타입 취급은 영화 속에서 설 자리가 없다. 만든 이들의 단호한 입장이 확실히 새겨질 정도다.

거장의 물질적 & 정신적 기원을 해설하다
 
▲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영화는 외형적으로 백남준이라는 거장에 관한 전기물 형태를 충실히 따른다. 전반적인 구성 또한 연대기 구조에 가깝다. 즉 도입부에서 주인공에 대한 압축적 이미지를 선보인 후, 이를 경유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순간부터는, 주인공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거장이자 한 인간의 생애 주기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전개되는 방법론을 취하는 것이다. 이렇게 듣기만 한다면 전위예술가의 생애를 너무 보편적인 형식으로 다루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될 지경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은 기우로 그칠 듯하다. 백남준의 생애 관련 서술은 그의 인생과 작품세계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기본정보 제공에 최적화되어 있다. 정교한 설정과 구획을 통해 한정 없이 늘어진다거나 혹은 'TMI' 분위기로 본 궤도를 추호도 이탈하지 않는다. 그에게 덧씌워진 단선적 이미지 이면을 적극 조명하는 과정을 통해 왜 백남준이 현대미술과 미디어아트에서 손꼽히는 위상을 갖게 되었는지 논증하는데 집중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 거장의 예술세계를 소화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친절하고 배려 깊은 태도의 '도슨트'를 만난 셈이다.

백남준의 가정환경은 아마 일제강점기에서 해방 전후 시기 격동의 한반도에선 가장 물질적으로 유복한 급에 속했을 수준이다. 유서 깊은 재벌 가문에서 태어나 최상류층이 누릴 복리를 누렸지만 가문의 후계자 경쟁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던 그는 정해진 경로를 기대하던 부친의 눈 밖에 난 채 겉돌던 존재다. 조선 내에서 명문 초중등 교육을 마친 후 격동의 해방전후 시기를 그는 가문의 덕을 적당히 얻어 벗어난다. 홍콩에서 일본으로, 다시 독일로 한국전쟁 전후 혼란을 빗겨나 예술가의 길을 걷기에 이른다. 반골 기질이 강하고 자신이 누리던 물질적 풍요에 의문을 품던 그는 이후 수십 년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독일 유학 중 뮌헨에 자리를 잡은 백남준은 음악과 미술 등 전 방위적 예술가의 꿈을 좇는다. 하지만 주류 예술에 기대는 것과는 정반대 방향을 잡는다. 학식 있는 식민지 상류층이 사교생활 교양으로 익힐법한 서양 클래식 대신, 그는 2차 대전 직후 잿더미가 된 채 재건도상에 있던 유럽에서 기성세대와 전통적 권위에 대항하던 전위음악에 흠뻑 빠진다. 아르놀트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에 심취했던 그는 존 케이지를 만나면서 전위예술가의 길로 본격 진입한다.

시련 속에서 전위예술가로,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나아가다
 
▲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우리는 백남준을 그저 뉴미디어 도입에 발맞춰 적극적으로 비디오 매체를 활용한 미디어아트 작가로만 인식하지만 실제로 그의 예술적 본령은 1960년대부터 본격화된 전위예술 그룹 활동에서 기원한다. 짧지 않은 무명예술가 시절 내내 '동굴'에 갇히지 않고 전 세계적 교류를 통해 그의 기본기가 형성되고 족적을 쌓아올린 것이다. 그는 존 케이지를 일생의 스승이자 동료로 삼고 오늘날 '플럭서스 Fluxus' 그룹이라 불리는 일군의 전위예술 작가들과 함께 공동 실천을 벌인다. '플럭서스'는 '흐름'이란 의미다. 해당 그룹 구성원들은 기존의 직업적 전문성을 띈 창작 과정이 숙련된 업무로, 예술가의 일상과 분리되는 것을 지양하고 작업 과정에서 예술 vs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갓 30대에 들어선 청년예술가 시절에 플럭서스 그룹 일원으로서 그가 펼친 퍼포먼스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중후반기 백남준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낯선 모습이다. 하지만 그는 그저 돌출된 개인이 아닌, 20세기 중후반 현대 예술을 재구성하는 집단적 실천의 맥락에서 중요하고 결정적이던 단계에 함께 했던 것이다. 말 그대로 역사의 한복판에 처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셈이다. 백남준은 존 케이지의 권위주의 혁파와 동양사상, 특히 선불교에 영향 받은 우연성의 창작 작풍을 받아들인 것은 물론 스승의 시도를 한층 더 밀어붙이는 일련의 작업으로 (대중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동료 예술가들 사이에선 명망을 쌓게 된다.

플럭서스 그룹 일원으로서 백남준은 피아노나 바이올린으로 상징되는 순수음악의 권위를 공격하는 과격한 퍼포먼스를 벌인다. 바이올린을 길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거나 피아노를 넘어뜨리고 깨부수는 퍼포먼스는 오늘날 행위예술 잣대로 본다면 종종 나올 법한 과격한 행태에 불과할지 모르겠지만, 그가 이런 전위적인 시도를 일삼던 게 1960년대 초반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화면을 보고만 있어도 아찔해질 노릇이다. 하지만 예술적 성공과 함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큰 무대로 가야만 했다.

백남준은 1964년 뉴욕으로 여러 난관을 돌파해 도착한다. 갓 식민지를 벗어난 한국에선 최상층에 속했지만 아직 동양계 진출이 뜸하던 미국에서 그는 '개발도상국' 무명예술가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 '차별'과 서구지상주의에 대한 반발은 이후 그의 예술세계에서 주요 화두로 놓인다. 뉴욕 실험예술가들과 교류하며 백남준은 다양한 활동을 펼치지만 후세의 우리는 상상하기 힘들 만큼 이 거장의 무명시절은 험난한 수준이었다. 끼니 걱정은 기본이고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삶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찬 법이다. 게다가 미디어의 급속한 발전에 눈뜬 그가 적극적으로 시도하려던 방식은 비용이 참 많이 들기도 했다.

이 시기에도 백남준은 플럭서스 그룹으로 공감대를 나누던 동료들과 함께 금기에 도전하고 형식을 파괴하는 일련의 퍼포먼스를 거듭 선보인다. 하지만 파격적 실험 과정에서 외설혐의로 체포되거나 평단의 혹평에 시달리는 등 곤란한 상황에 처하곤 했다. 특히 경제적 불안 상태가 일상적인 시련으로 그를 괴롭혔다. '거장' 칭호가 당연시되는 오늘날의 위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다. 하지만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 방위 퍼포먼스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자원과 예산이 필수가 된 현대예술가의 일상적 고충을 예시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팔리지 않으면'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없다. 백남준의 생애를 고찰하는 것과 함께 현대 예술의 숙명을 상기하게 만드는 지점이라 하겠다.

시대의 변화를 조망하는 선지자의 길을 걷다
 
▲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바야흐로 그가 예술가의 길을 걷던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전반은 20세기 전반을 풍미한 라디오 대신 텔레비전이라는 전자기술로 가득한 상자가 보편화되던 시절이다. 기계와 전자기술 발전으로 흑백을 넘어 컬러 TV가 대중화되고, 인공위성이 성층권에서 가동되는 급진적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인 백남준은 아직 사치품에 가깝던 TV와 초기 버전의 VCR 카메라에 매료된다. 아직도 예술계는 회화와 조각이 순수 장르, 사진과 영화는 통속에 불과하다고 등급을 나누던 시기에 백남준은 예술로 분류되지도 않던 비디오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도전한다. 기술문명의 이기를 소화하기 위해 물리학과 전자공학을 마스터할 정도였다. 심지어 자신의 거리 퍼포먼스를 위해 1960년대 중반에 벌써 실용적으로 구동되는 로봇을 제작해 활용하기에 이른다.

그는 비디오아트의 초창기 걸작 중 하나인 <글로벌 그루브>를 1973년 야심차게 선보이지만, 오늘날 MTV를 필두로 한 뮤직비디오의 효시로 통하는 해당 작업은 그 기술적 성취와 비전에도 불구하고 평단의 외면에 가로막힌다. 어느새 중년이 된 상황이지만 동료 전위예술가 아내와 함께 여전히 생활고에 쪼들리던 처지는 여전했다. 그런데도 돈만 생기면 앞뒤 안 가리고 눈에 들어온 소품을 '지르던' 백남준은 1975년, 그렇게 충동 구매한 불상을 CCTV와 결합한 (훗날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손꼽히게 될) <TV 부처>를 선보이게 된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미래의 대비를 구현한 해당 작업을 통해 비로소 그는 대중적 명성과 함께 상업적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제 비약적으로 보장된 활동기반을 바탕으로 자신의 머릿속 아이디어로만 떠돌던 미래지향적인 비전을 선보일 기회가 온 것이다.

1980년대 들어 백남준은 생애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서구 근-현대 문명에 대해 외부자로서 편견과 차별에 시달려온 그로선 일생일대의 반론권을 행사한 것은 물론, 비디오아트를 넘어 20세기 말 인류 과학기술의 정점이라 할 인공위성 네트워크를 활용한 생방송 퍼포먼스에 도전한 것이다. 20세기를 상징하는 비판적 지성으로 손꼽히던 조지 오웰이 그의 대표작 <1984>에서 기술독재로 흐르는 근 미래 '디스토피아'를 예언한 것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려는 실천이기도 했다. 그 <굿모닝 미스터 오웰> 퍼포먼스가 1984년 새해 첫날 세계 곳곳을 연결하며 동시 방영되기에 이른다. 이후 그에 맞먹는 대작들을 1980년대 내내 선보인다.

그리고 34년 만에 고향땅에 귀국해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 수출상품으로 거대한 명성과 각광을 획득하고 만다. 실로 금의환향이라 할 만하지만 이미 부모님은 모두 별세한 뒤였다. 게다가 가족이 경영해온 대기업은 박정희 정권에게 부정축재 명목으로 몰수당해 형제자매 대부분은 일본으로 귀화해버렸다. 그럼에도 이제 국가적 환대를 받게 된 백남준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설치작품인 <다다익선>등을 작업한다. 또한 광주 비엔날레의 산파 역할을 도맡는 등 한 세대가 훌쩍 지나 돌아온 고향에 많은 선물을 안긴다. 독일 유학파에다 한국의 군사독재에 반대활동을 펼치던 음악가 윤이상처럼 적극적으로 발언하진 않았으되, 그가 한국에 머물러 있었다면 온전한 활동은 어려웠을 것이란 추측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인 셈이었다.

백남준이란 거대한 '숲'을 투영하도록 이끄는 가이드

하지만 왕성한 활약도 잠시, 1960년대 교우하던 벗들의 죽음을 거듭 목격하게 된 1990년대를 맞이한 백남준은 젊은 시절 무리를 해서인지 갑작스레 중풍을 맞이한다. 투병생활 과정에서 이 세계적 예술가는 지체장애인 신세가 된다. 나날이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어느새 현대예술을 상징하는 아이콘 자체가 된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다 2006년 세상을 떠난다. 영화는 그의 염원이 투영된 유작과 함께 이 거대한 예술가의 궤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과연 압도적인 이름 아래 가려진 그는 어떻게 기억해야 마땅한지 갈무리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영화는 거의 2시간 가까운 분량을 꽉꽉 채워내 관객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내용을 전달하려 애쓴다. 하지만 이 한 편만으로 거인의 시야를 관객이 날로 먹는 건 불가능함을 숨기지 않는다. 해당 작품은 그야말로 발췌 및 요약에 충실한 개괄 입문서의 역할을 자임하려 한다. 그래서 백남준에 대해 평소 작업을 접해왔거나 해당 분야 소양을 지닌 이들이라면 본 작품이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닐 테다.

하지만 텍스트로만 접해 왔거나 개별 작품을 전시장에서 보던 일회성 체험에 그친 이들에겐 지금껏 파편적으로 만나온 거장의 진면목을 깨닫게 해주는데 모자람이 없다. 이 작품 덕분에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 그의 시선을 간접적으로나마 체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 차원이 다른 통합적 분석과 시야를 제공하는 순도 높은 효용성을 마음껏 뽐내려는 작업이다. 그런 측면에서 본 작품의 충실한 연대기적 구성은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그저 피상적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현대 비디오아트가 어떤 과정과 기반으로 형성되어왔는지 개괄과 함께 배경을 동시에 전해주는 기획은 반갑기 그지없다. 백남준의 얼핏 난해하게만 보이는 일련의 퍼포먼스들이 동시대와 어떤 맥락으로 연결되는지, 그리고 그가 개별 작가를 초월해 문화담론을 선도하는 '예언자'로 부각되는 이유를 일관된 논리와 맥락으로 제시해준다. 그렇게 적재적소에 안배된 열쇠들로 백남준이란 '거인'이 갖는 가치와 위상에 대해 친절하게 해설해준다.

그런 체험과정을 거쳐 그저 거대한 규모와 현란한 이미지의 춤사위로만 보였던 그의 대표작들이 알고 보니 오늘날 보편화된 '정보 초고속도로'나 유튜브, 인터넷 네트워크, 심지어 IPTV와 OTT 환경을 길게는 반세기 전에 예지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 순간 대체 이 사람의 머릿속에는 무엇이 공전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흔한 미래학자와도 백남준은 격을 달리한다. 단지 기술문명의 발전을 찬양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적극적으로 인류사회의 문제 해결에 전용하고 가능성과 동시에 위험요소도 고찰하려는 태도는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 모범사례처럼 다가온다.

그는 전위이자 소수자로서 정체성을 놓지 않은 것은 물론, 후기 식민주의와 서구의 알량한 오만에 대해 통렬한 풍자와 일격을 가했고, 정치군사적 냉전과 전통의 붕괴로 인한 사회문화적 혼란 가운데 냉소와 회의로 치닫기 쉬운 경향에 대해 기술 활용에 대한 낙관적 기대감을 놓지 않도록 격려해왔다. 동양과 서양의 교류를 염원했고 20세기의 수많은 비극을 불러온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를 끊임없이 제기했다.

전기영화를 초월해 거장의 자취를 재현하는 헌사
 
▲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주)엣나인필름
 
이 전기 다큐멘터리를 온전히 소화해낸다면 이로움이 절대 작지 않을 테다. 일단 현대미술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혹은 매너리즘에 대한 가혹한 배격)에서 벗어나는데 탁월한 효능을 과시할 만하다. 더불어 (밥 먹는 데 아무 실용적 기능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에 대해 보다 여유롭게 접근할 기회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필자는 1984년 새해 초반 KBS에서 중계되던 '굿모닝 미스터 오웰' 퍼포먼스 방영을 보면서 '뭔가 대단히 멋있어 보이긴 한데 무슨 내용인지는 하나도 모르겠다!'는 감상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했었다. 조지 오웰과 < 1984 >에 대해 정말 피상적으로 들어보긴 했지만 이 뉴미디어의 향연이 그와 어떤 관계성을 갖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후로도 문헌상으로 백남준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할지언정 그의 예술적 진의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었던 꼴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3줄 요약은 가능해졌다. 다 이 작품 덕분이다.

물론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영화 속 거장의 탄생과정이 그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강림한 게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입문용으로 이만한 교재가 또 있을까? 영화는 내용을 충실하게 요약 편집하는데 그치지 않고 형식과 장치의 정교한 배열을 통해 백남준의 작품세계를 공감각적으로 구현하려는 도전으로 충만해 있다. 마치 백남준을 상징하는 아이콘, 가로세로 정교하게 교차하는 TV 모니터 속 주사선처럼 수많은 다국적 제작진의 협력과 수고 덕분에 근사한 체험을 누릴 기회를 얻었다. 게다가 백남준이란 아름드리 거목을 통해 연결되는 거대한 현대미술의 숲 속 또 다른 거목들을 눈요기하는 호사가 덤으로 추가된다.

물론 어맨다 킴 감독과 총괄 프로듀서이자 (백남준의 생전 글들을 낭독하는) 내레이션까지 도맡은 스티븐 연 등 제작진이 백남준을 기억하고 기꺼이 헌사를 바치려는 마음이 모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노고를 온전히 체감하기 위해 있기에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감상은 극장 개봉 시기에 큰 화면으로 오롯이 몰입할 때 최상의 가치를 얻게 될 성질의 것이다. 그렇게 온전히 집중할 때, 백남준이 일평생 추구해온 가치 중 하나의 본연과 영화의 작명이 '통'하는 이치에 근접할 테다.

<작품정보>

백남준: 달은 가장 오래된 TV
Nam June Paik: Moon Is the Oldest TV
2023|미국|다큐멘터리
2023.12.06. 개봉|110분|12세 관람가
감독 어맨다 킴
총괄 프로듀서 스티븐 연, 스티브 장, 플로렌스 슬론, 팹 파이브 프레디,
       알렉산드라 먼로 외
출연 백남준, 스티븐 연(내레이션 역)
수입ㆍ배급 (주)엣나인필름

2023 가디언 선정 올해의 영화
2023 선댄스영화제 경쟁
2023 텔아비브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경쟁
2023 코펜하겐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스페셜 프리미어 초청
2023 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베리테 초청
2023 MoMA Doc Fortnight 오프닝 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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