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닷컴 메인 장식한 이정후, 어떻게 '1억 달러 빅리거' 꿈 이뤘나
이정후(25)는 초등학교 6학년이던 2010년 매일 쓰던 일기장에 '버킷 리스트'를 하나 만들었다. 야구선수로서 언젠가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이랬다. '1차 지명으로 프로 입단, 국가대표로 국제대회 출전, 골든글러브 수상, 타격왕, 신인왕, 한국시리즈 우승,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 메이저리그(MLB) 진출.' 꼬마 야구선수의 당찬 포부였다.
2017년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이정후는 이 리스트를 놀라운 속도로 지워나갔다. 남들은 하나만 해내기도 어려운 과제들을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그 자신도 "그때는 정말 '꿈'이라고 생각하면서 썼을 텐데, 대부분 실제로 이뤄졌다는 게 신기하다"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 그는 아직 이루지 못했던 항목 두 개 중 가장 원대했던 마지막 목표 하나까지 결국 '현실'로 만들었다.
MLB닷컴, EPSN, 디 애슬레틱 등 미국 언론은 13일(한국시간) "한국인 외야수 이정후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6년 1억1300만 달러(약 1484억원)의 조건에 입단 합의했다"며 "4년 뒤 옵트아웃(구단과 선수 합의에 따라 계약 파기) 조항도 포함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MLB닷컴은 이 소식을 홈페이지 첫 화면 메인 뉴스로 띄워 이정후를 향한 관심을 짐작하게 했다.
새로운 역사다. 이정후가 계약한 1억1300만 달러는 포스팅 시스템(비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MLB에 진출한 KBO리그 출신 선수 중 역대 최고액이다. 2013년 류현진이 LA 다저스에 입단하면서 받은 6년 3600만 달러 기록을 이정후가 11년 만에 넘어섰다.
연평균 최고액도 갈아치웠다. 종전 기록은 김하성(샌디에이고 파드리스)이 2021년 사인한 연평균 700만 달러(4년 2800만 달러)였다. 이정후는 연간 약 1883만 달러(약 267억원)에 계약해 김하성보다 2.5배가량 많은 연봉을 받게 됐다.
자유계약선수(FA) 계약까지 범위를 넓혀도 톱클래스다. 이제 MLB에 첫발을 내딛는 이정후는 빅리그에서 역대 가장 성공한 한국인 타자로 꼽히는 추신수(SSG 랜더스)의 과거 연봉을 이미 추월했다. 추신수는 2014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7년 1억3000만 달러에 FA 계약을 했는데, 연평균 수령액은 1857만 달러로 이정후보다 조금 적다. 2020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4년 800만 달러(연평균 2000만 달러)에 FA 계약한 류현진에 이어 이정후가 한국인 선수 연평균 계약 2위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해외 리그에서 뛰고 있는 축구 국가대표 손흥민(토트넘)과 김민재(FC 바이에른 뮌헨)의 연봉도 이정후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손흥민은 올해 주급 21만 파운드를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봉 기준으로는 1092만 파운드(약 155억원)를 수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민재의 추정 연봉도 1200만 유로(약 171억원)다. 다만 이들의 가치는 천문학적인 이적료에서 드러난다. 손흥민은 2015년 이적료 3000만 유로(약 427억원)를 전 소속팀에 안겼고, 김민재는 지난 7월 5000만 유로(약 711억원)의 이적료로 아시아 출신 선수 역대 최고액을 기록했다.
이정후는 2017년 넥센(현 키움) 히어로즈 1차 지명을 받고 프로에 입단한 뒤 7시즌 통산 타율 0.340을 기록하면서 KBO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자리 잡았다. 데뷔 첫해 신인왕을 차지했고, 2021년 타격왕·2022년 정규시즌 MVP 트로피를 잇달아 들어 올렸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이끄는 등 국가대표팀 중심타자로도 활약했다.
그는 올 시즌이 끝난 뒤 원소속구단 키움의 동의를 얻어 MLB 포스팅에 나섰다. 올 시즌 부상 여파로 86경기(타율 0.318) 출전에 그쳤지만, 걸림돌은 되지 못했다. 뉴욕 포스트는 "MLB 30개 구단 중 20개 팀이 이정후를 지켜보고 있다"고 전했다.
그중에서도 샌프란시스코는 이정후에게 가장 적극적이고 꾸준한 관심을 표현해왔다. 피트 푸틸라 샌프란시스코 단장이 지난 10월 서울 고척스카이돔을 찾아 이정후의 마지막 타석을 직접 지켜보고 기립박수를 보냈다. 지난달 샌프란시스코 지휘봉을 잡은 밥 멜빈 감독은 "우리 팀은 운동 신경이 뛰어나고 수비력도 갖춘 새 중견수가 필요하다"며 이정후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멜빈 감독은 올해 샌디에이고에서 김하성을 주전 내야수로 중용한 지도자다.
막강한 경쟁자들이 이정후 영입전에 뛰어들어 샌프란시스코를 위협하기도 했다. 포스팅 초반에는 뉴욕 양키스가 라이벌로 나섰고, '갑부 구단' 뉴욕 메츠도 손을 뻗었다. 샌디에이고는 주전 외야수 2명을 트레이드로 내보내면서 강력한 의지를 표현했다. 최근에는 '최대어'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를 놓친 토론토가 이정후 쪽으로 관심을 돌릴 거라는 예측도 나왔다. 협상에 한창이던 이정후에게는 확실한 호재였다.
그래도 이정후의 '몸값'이 1억 달러까지 치솟을 거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언론이 4~5년 기준 5000~6000만 달러 계약을 점쳤다. CBS스포츠가 예상한 6년 9000만 달러가 최대치였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이정후를 확실히 붙잡기 위해 과감한 베팅을 단행했다. 이정후의 포스팅 기한은 내년 1월 4일까지지만, 양측이 합의에 이르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속전속결로 이정후의 새 소속팀이 결정됐다.
이로써 이정후는 내년 3월 29일 정규시즌 개막전에서 샌프란시스코 유니폼을 입고 MLB 데뷔전을 치르게 됐다. 공교롭게도 이정후가 만날 첫 상대팀은 김하성이 몸담고 있는 샌디에이고다. 김하성과 이정후는 키움에서 4년간(2017~2020년) 함께 뛰면서 깊은 친분을 쌓아온 사이다. 이정후가 김하성에 이어 MLB에 안착하면서 바다 건너에서도 특별한 인연을 이어가게 됐다. MLB 네트워크는 "이정후가 내년 시즌 개막전에 1번 타자 중견수로 나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해 샌디에이고의 1번 타자는 김하성이었다.
배영은 기자 bae.younge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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