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군사독재 우화적 비판 영화 '태', 37년 만에 재평가

성하훈 2023. 12. 13.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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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정지영 박찬욱 감독 등이 마련한 1980년대 영화 특별시사회

[성하훈 기자]

 한국영상자료원 <태> 복원판 상영회에 참석했던 정지영 감독, 하명중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박찬욱 감독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지난 11일 저녁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열린 하명중 감독의 1986년 작품 <태> 시사회에는 250석 극장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관객이 몰렸다. 참석자 면면도 화려했는데, 봉준호, 박광수, 김대현 감독 등을 비롯해 김동호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 김종원 평론가, 전양준 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양윤호 한국영화인총연합회장, 김선아 여성영화인모임 대표 등등 한국영화의 주요 인사들 상당수가 자리했다.

37년 전인 1986년 만들어진 영화에 국내 영화인들을 비롯한 관객들이 대거 몰린 이유는 숨겨진 걸작이라는 이야기가 퍼지면서였다. <태>는 앞서 지난 11월 25일 영상자료원에서 디지털 복원판이 공개된 이후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명중 감독의 제안에 영상자료원이 영화적 가치를 인정해 복원한 것이었는데, 다수 감독이 작품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박찬욱 감독은 "1980년대 한국영화사를 다시 쓸 작품"이라고 했고, 정윤철 감독은 "이런 한국영화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신선하고 영화적인 힘이 넘쳤다"며 "전두환 5공 정권의 검열로 묻혀버린 작품이었다"고 평가했다.

영상자료원에서 작품을 확인한 정지영, 이준익, 박찬욱, 정윤철 감독 등이 이렇듯 빼어난 수작을 묻히게 할 수 없다는 데 의기투합해 특별한 시사회를 마련한 것이었다. 사실 영상자료원에서 복원한 영화를 따로 극장을 빌려 상영하는 것 자체가 전례가 없을 정도여서, 유료시사회로 진행됐음에도 영화인들의 관심이 폭발했다.

정윤철 감독은 "전두환 군사독재의 정권찬탈을 다룬 <서울의 봄>이 개봉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 이 시기에, 당시 서슬 퍼런 군사 정권에 영화로 당당히 맞섰던 저항정신과 더불어 문화적 탄압으로 공개되지 못했던 강렬한 시네마틱 이미지의 힘을 늦게나마 극장 스크린으로 볼 수 있어 더 뜻깊은 자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영화법 완화 틈새 뚫고 군사독재 비판
 
 하명중 감독 <태>(1986) 스틸 사진
ⓒ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하명중 감독의 <태>는 1920년대를 배경으로 작은 섬의 권력을 쥐고 있는 최 부자와 주변 인물들에게 수탈과 억압 당하는 섬 주민들을 그린 작품이다. 평화로웠던 섬은 부패한 권력과 앞잡이들로 인해 혼탁해졌고, 착취 당하면서도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던 주민들은 마침내 분노하게 된다. 외딴 섬의 모습을 담고 있으나 실제로는 1980년대 쿠데타와 양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우화다.

권력에 빌붙어 제 역할을 못 하는 만신(무당)은,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고 등장한 전두환 정권 밑에서 이들을 찬양하던 종교인과 언론 등을 풍자한 것이었다. 섬이 죽었다고 울분을 뱉는 주민들 속에서도, 민중이 섬의 주인이고 미래에 새로운 희망이 있음을 아이의 탄생을 통해 상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태>는 하명중영화제작소의 첫 작품으로 1985년 7월 개정된 영화법이 발효된 이후 만들어진 첫 영화라는 의미도 있다. 군사독재 시절 내내 통제와 검열을 기조로 한 영화법은 자유로운 제작을 막았고, 일정한 금액을 예치한 제작사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불합리한 규정이 내내 이어지다가 1985년을 기점으로 다소 완화됐는데, 이때 신규 제작사 1호가 하명중영화제작소였다. 그 첫 작품이 군사독재를 비판하는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운동사에도 매우 가치 있는 작품이다. 당시 스태프로 참여한 인사 중에는 독립영화의 대부라고 불리는 김동원 감독도 있다.

영화 통해 나타낸 저항의지
 
 12월 11일 서울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진행된 <태> 특별시사회가 끝나고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 왼쪽부터 김영동 음악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하명중 감독, 마흥식 배우, 진행을 맡은 정윤철 감독
ⓒ 성하훈
 
영화 상영이 끝난 후에는 관객과의 대화도 이어졌다. 하명중 감독과 정일성 촬영감독, 김영동 음악감독, 마흥식 배우가 참여해 영화의 뒷이야기를 전했다.

하명중 감독에 따르면 박정희 군사독재가 종식된 이후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독재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영화의 주무대로 설정된 낙월섬은 한반도를 은유한 것이었다. 당시 검열기관은 민중봉기를 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했다고 한다. "다행히 그 당시 검열기관이었던 공연윤리위원회(공륜) 최창봉 위원장이(작고, 전 MBC 사장) 통과시켰고, 그 즉시로 필름을 갖고 해외로 나간 것이었다"고 밝혔다. 최 위원장은 이후 잘렸다고 덧붙였다. <태>는 1985년 11월 30일 심의를 받았는데, 최창봉 당시 공륜위원장은 다음 달인 12월 26일 물러났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당시 시나리오를 보고 하 감독이 미쳤구나, 왜 이런 작품을 선택했지? 싶었다"며 "촬영하기 힘든 섬이었고, 두 달 정도 머물며 찍었는데, 배우와 스태프들 불만이 폭발할까 걱정돼 거의 매일 영화 강의를 했다"고 회상했다.

이날 하명중 감독은 "정일성 촬영감독의 특출한 미장센이 없었다면 완성이 어려웠다"며 "정일성 감독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일성 감독은 "하명중 감독과 상의하면서 찍었다"며 "하명중 감독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말하는 등 감독과 촬영감독이 서로에 대한 존중과 찬사를 이어갔다.
 
 11일 저녁 <태> 상영과 관객과의 대화가 끝난 후 진행된 기념촬영
ⓒ 정윤철 감독 제공
 
하명중 감독은 1970년대 한국영화의 기대주였으나 너무 일찍 요절한 고 하길종 감독의 동생으로 형의 뜻을 이어받아 암흑의 시기 영화를 통해 저항의지를 엿보인 것이었다.

정윤철 감독은 "동시대 최고의 배우였던 하명중이 형님의 유언을 받들어, 감독으로서 찍은 이 작품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을 연상케 하는 원초적 인간성과 파졸리니 감독의 권력에 대한 우화적 비판정신, 그리고 하명중만의 강렬한 에너지와 주제 의식이 작품 전체에 일렁거린다"고 평가했다.

올해 94세인 정일성 촬영감독은 1987년 전두환 정권을 규탄한 영화인 시국선언을 정지영 감독과 함께 주도했을 만큼 충무로에서 개혁성이 강했던 거장 촬영감독이다. 이날 특별시사회가 성황을 이룬 것도, 정일성 촬영감독이 직접 나온 것 때문이기도 했다. 정일성 감독은 영상이 아름답다는 평가에 대해 "아름답게 촬영하고자 한 적이 없다"면서 "아픔과 슬픔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태>가 뒤늦게 주목받고 있는 것은 1980년대 전두환 군사독재 등장 과정에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는 가운데, 지금 현실과의 비교가 작용하는 모습이다. 그 시절 주목받지 못했던 권력 비판 영화가 재평가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커 보인다. <태>는 한국영상자료원이 최근 유튜브를 통해서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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