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엄마 "나, 고향 가고싶다"…갑자기 일본말 쏟아낸 사연
한일 역사가 찢어놓은 모녀
일본인 외할머니 찾아 모녀 여정
감독 가족 실화 데뷔작에 담아
자식이 나이 들고서야 알게 되는 부모의 아픔이 있다. 영화 ‘교토에서 온 편지’(6일 개봉)는 부산 영도에서 자란 세 자매가 아버지 제삿날 오랜만에 고향 집에 모여 오래된 일본어 편지 꾸러미를 발견하는 이야기. 50년간 엄마가 가슴에 묻어온 비밀이 네 모녀를 일본 교토로 향하게 한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장편과정 15기 연구생인 김민주(33) 감독이 실제 일본인인 외할머니와 어릴 적 생이별하고 한국에 건너와 평생 영도에서 살아온 어머니 삶에 허구적 설정을 보태 영화로 만들었다. 촬영도 대부분 부산에서 했다.
‘엄마는 왜 영도를 떠나지 않을까? 낡아 빠진 물건도 버리지를 않을까? 왜 읽지도 못하는 일본어 편지를 넣어만 두고 외할머니를 평생 그리워만 했을까….’ 극 중 꼬리에 꼬리를 무는 딸들의 질문이, 때 이른 치매 증세가 시작된 엄마의 유년시절 기억을 끄집어낸다. 이런 눈물 젖은 사연을 담담한 일상 속에 풀어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해 “섬세하게 감정의 켜를 쌓는 결이 고운 영화”로 호평받았다. 올해 프랑스 브줄국제아시아영화제 심사위원상‧INALCO특별언급상, 스페인 이매진인디아 국제영화제 각본상(러너업) 등을 수상했다.
한일 아픈 역사, 일본인 외할머니 생이별한 엄마
극 중 여정 속에 밝혀지는 건 역사가 만든 비극이다. 일제강점기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그 시절, 돈 벌러 일본에 온 한국 남자와 사랑에 빠진 외할머니는 엄마를 낳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런 아내를 보다 못한 외할아버지가 어린 딸만 데리고 야밤의 밀항선으로 귀국하면서 모녀는 작별인사도 못 한 채 헤어졌다. 한‧일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던 시대다. 이후 10년 만에 끊긴 외할머니의 마지막 편지 발송지는 교토의 한 정신병원이었다. 일본인이라면 질색했던 그 당시 또래의 동네 아이들 틈에서 엄마는 더듬더듬 한국말 말문을 트며 일본을 지워간다. 그러나 애틋한 모정은 잊히지 않는다.
치매 엄마의 고백…딸들과 50년 만에 일본 고향길
홀로 된 엄마가 안쓰러워 떠나지 못했던 첫째 혜진(한채아)과 작가의 꿈을 못 이룬 채 낙향한 둘째 혜영(한선화), 서울에서 자유롭게 춤추고 싶은 막내 혜주(송지현)…. 각자의 이유로 방황해온 딸들도 엄마의 곁에서 덩달아 외면해온 스스로의 문제를 마주한다. 엉망이 된 얼굴로 서로 밑바닥을 드러내고, 냉장고 안에 얼어붙어 있던 식료품에 얻어맞아 울면서 주저앉는 한밤중 다툼이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는 약이 된다.
지금도 부산에 거주 중인 차미경을 비롯해 한선화‧한채아 등 실제 부산이 고향이거나 부산에서 활동 중인 배우‧스태프가 뭉쳐, 사투리 대사 처리부터 자연스럽다. 극 중 세 자매는 고전 『작은 아씨들』과도 닮은꼴. 엄마의 편지를 발견하는 혜영 역은 최근 드라마 ‘술꾼 도시 여자들’ ‘구해줘2’, 영화 ‘달짝지근해; 7510’ ‘창밖은 겨울’ 등 스펙트럼을 넓혀온 한선화가 질박한 생활 연기로 소화했다. ‘연모’ ‘금수저’ ‘꽃선비열애사’ 등 TV 드라마로 주로 만나온 한채아, 넷플릭스 시리즈 ‘지옥’, 드라마 ‘홈타운’ ‘소용없어 거짓말’ 등의 신인 송지현의 자매 호흡도 자연스럽다.
영화 ‘피의 연대기’ ‘두 사람을 위한 식탁’ 등의 촬영감독, 광고 촬영 아르바이트를 겸하며 코로나 시기에 데뷔작인 이번 영화를 어렵게 찍었다는 김민주 감독은 “서울에서 대학에 들어간 뒤 10년 만에 고향 부산에서 장기 체류하며 영화를 찍었다”면서 “고향이 주는 안정감, 어릴 적 추억이 담긴 장소와 사람이 주는 긍정적 에너지가 있더라. 영화를 보며 각자의 공간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번 영화를 통해 가까운 친척들도 어머니의 사연을 잘 몰랐던 걸 알게 됐다. 저 또한 어머니를 모르고 지냈다는 걸 깨달았다”면서 “극 중 혜영처럼 저도 중요한 문제를 회피하는 성격인데 그처럼 닮은 모녀가 자신을 마주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내가 누군지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명확히 알면 가족끼리 단단하게 뭉칠 수 있다"며 "역사를 알면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는 걸 영화를 만들며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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