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2일 오후 12시 12분, 그들은 왜 대전현충원에 모였나
[임재근 기자]
▲ 12월 12일 낮 12시 12분에 시작된 대전현충원 답사에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분노한 사람들 40여명이 현충문 앞으로 모여들었다. |
ⓒ 손승목 |
12월 12일 오후 12시 12분, 대전현충원 현충문 앞에는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분노한 사람 40여 명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렇게 모이기 시작한 계기는 <오마이뉴스>에 연재 '대전현충원에 묻힌 이야기'를 쓰는 시민기자들이 영화를 본 후 분노한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할까 고민을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영화의 맨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사진 한 장. 1979년 12월 14일, 군사반란에 성공한 신군부 세력이 보안사에 모여 자축 파티를 연후 보안사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입니다.
▲ 1979년 12월 14일 12.12 쿠데타 주역들이 보안사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
ⓒ 오마이뉴스 재편집 |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반란군
그런데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20사단장 박준병, 보안사대공처장 남웅종, 71방위 사단장 백운택의 사진은 합성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들 3명은 사진 찍던 당시 자리에 없어 사진 촬영 후 합성해 넣었습니다.
군사반란을 일으킨 지 44년이 지났기에, 이 사진 속에 등장한 34명 중 절반 이상은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34명 중 10명이 죽어서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관련 기사: 진압군과 나란히... 양지바른 곳에 묻힌 그날의 반란군들 https://omn.kr/26q0q)
당시 반란군 세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연행되었던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도 대전현충원 장군 제1묘역(13호)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다수의 장군과 장교가 반란군 편에 섰던데 반해,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애를 썼지만, 진압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강제 예편당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장군2-132)과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장군2-6)도 대전현충원 장군 제2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 답사 참가자들이 현충탑 앞에서 대전현충원 준공 당시 대통령이었던 전두환의 흔적에 대한 이야기를 임재근 해설사로부터 듣고 있다. |
ⓒ 정성일 |
12월 4일에 영화를 본 저희는 그날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12.12 관련자들의 묘를 찾아 영화와 현실을 대비해 보는 시간을 갖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일이 평일인지라 많은 사람이 함께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히 홍보물을 만들어 SNS에 올렸습니다. 걱정과 달리 일주일 만에 40여 명이 신청을 하며, 영화 <서울의 봄>의 인기를 다시금 실감했습니다.
▲ 대전현충원 현충문에서 대통령 묘역까지는 800미터 떨어져 있어 도보로 이동을 해야만 했다. |
ⓒ 정성일 |
▲ 대전현충원 대통령묘역에 홀로 안장되어 있는 최규하 대통령 묘 앞에서 임재근 해설사는 대통령의 책무와 침묵의 비겁함에 대해 이야기 했다. |
ⓒ 정성일 |
대전현충원 현충문을 집결 장소로 정해 모인 참가자들은 상징적인 날에 상징적인 시간인 12월 12일 12시 12분부터 답사를 시작했습니다. 현충문과 대통령 묘역에서는 필자가 마이크를 잡고 해설에 나섰습니다.
현충문과 현충탑에서는 전두환 정권 때 준공된 대전현충원에 남아 있는 전두환의 흔적과 영화 속 인물 '전두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다음으로 현충문에서 800여 미터 떨어진 최규하 대통령 묘역까지 도보로 걸었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은 전두환을 비롯한 반란군들이 여러 차례 대통령을 찾아가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을 위한 재가를 요청했으나, 영화에 나온 것처럼 국방장관의 동의가 필요하다며 거절한 인물입니다.
반란에 성공한 13일 오전 5시 10분쯤, 전두환과 함께 온 노재현 국방부장관은 신현확 국무총리, 최광수 대통령 비서실장이 배석한 가운데 대통령에게 '사태가 더는 확대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재가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고, 최규하 대통령은 정승화 총장 연행보고문서에 사후재가 서명을 했습니다.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는 12.12사건 관련 재판에서 최규하 대통령이 일자와 시간을 기재해 재가했다고 증언했지만, 현재까지 확인된 실제 재가 공문에는 1979.12.12로 되어 있습니다.
▲ 장군 제1묘역 2호에 안장된 유학성의 묘 앞에서 김선재 해설사는 12.12군사반란에 적극 가담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판결 전 사망해 국립묘지에 안장되게 된 이유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설명했다. |
ⓒ 임재근 |
▲ 김선재 해설사는 장군 제1묘역 13호에 안장된 정승화 참모총장의 묘 앞에서 정 총장이 17계급이나 강등 당하는 굴욕적 처분을 받고 불명예 전역했던 사연 등을 소개했다. |
ⓒ 임재근 |
유학성과 정승화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장군 제1묘역입니다. 장군제1묘역은 대통령묘역 바로 옆이지만, 능선이 두 묘역을 나누고 있어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사이 몇몇이 뒤늦게 합류하면서 일행은 50명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장군 제1묘역 이차군(장군1-191) 묘 앞에는 김선재 시민기자가 참가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차군은 12.12군사반란 당시 보안사 군수처장으로, 군사반란세력이 1979년 12월 14일 보안사 건물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던 34인 중 1명입니다. 장군 제1묘역에는 12.12군사반란 당시 국방부 군수차관보였던 유학성(장군1-2)도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전두환보다 선배였던 유학성은 수도방위사령부 30경비단 모임에 참석한 핵심 인물로 지목돼 군 형법상 반란중요임무 종사 등의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습니다. 그러던 중 병세가 악화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되었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2주일여 앞두고 1997년 4월 3일에 사망해 국립묘지에 안장된 논란의 인물입니다.
장군 제1묘역에서 유학성과 같은 줄에는 비운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장군1-13)도 안장되어 있습니다. 김선재 기자는 12.12군사반란을 죽을 때까지 인정하지 못한 유학성 같은 사람이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는 현실에 분개했고, 정승화 참모총장이 17계급 강등당하는 굴욕적 처분을 받고 불명예 전역했던 사연도 소개했습니다.
▲ 12.12군사반란 하나회 세력의 반란 사실을 알고 진압하려 경주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던 김진기 헌병감의 이야기를 영화 ‘서울의 봄’과 연결지어 설명하고 있다. |
ⓒ 임재근 |
▲ 12.12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이었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의 삶에 대해 정성일 해설사가 설명하고 있다. |
ⓒ 임재근 |
진압군과 반란군이 나란히
장군 제1묘역과 장군 제2묘역도 능선으로 나뉘어 있지만, 그 사이를 연결하는 보훈둘레길(노랑길 코스)이 있어 산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장군 제2묘역에서 처음으로 마주한 인물은 대표적 분노 유발자, 당시 국방장관 노재현(장군2-523)의 묘였습니다.
장군 제2묘역에서는 정성일 시민기자가 해설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노재현 장관의 묘 앞에서 정성일 기자로부터 영화보다 더 답답한 사실을 들은 참가자들은 진압군으로 나섰던 이들의 묘를 찾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먼저 찾은 이는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장군2-6) 묘역입니다. 김진기 헌병감은 장태완 수경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함께 군사반란세력에게 연희동 위장 만찬에 유인되었다가 전두환 등 하나회 세력의 반란 사실을 알고 진압하려 경주하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보안사로 끌려가 고초를 당했고 1980년 강제로 예편했습니다.
김진기 헌병감의 묘와 멀지 않은 곳에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2-132)의 묘가 있습니다. 장태완 장군은 군사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가장 적극적이었던 인물로, 영화에서는 정우성 배우가 열연했던 이태신의 역할로 생생히 볼 수 있었습니다. 장태완 장군도 보안사로 끌려가 강제예편 당했는데, 본인의 고초로 끝나지 않고 가족사마저 비극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TV를 통해 장태완 소장이 보안사에 끌려가는 모습을 본 뒤 곡기를 끊고 매일 술에 의지하다 1980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안사에서 풀려난 뒤로도 장태완은 가택 연금을 당했는데, 그 와중에도 열심히 공부한 장태완의 아들은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입학 했지만, 1982년 집을 나간 후 낙동강 변 야산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꽁꽁 얼어붙은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장태완 장군의 부인도 장태완이 사망한 후 2년 뒤인 2012년에 아파트에서 투신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 2010년 7월 24일에 사망한 정도영(오른쪽 묘, 장군2-131)은 12.12반란군이었고, 2010년 7월 26일에 사망한 장태완(왼쪽 묘, 장군2-132)은 진압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틀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떠나면서 대전현충원에 진압군과 반란군이 나란히 묻히게 되었다. |
ⓒ 임재근 |
이날 답사에 참여한 대전 서구 월평동에서 온 김정례씨는 "지난 주말에 영화를 봤다"며 "대전현충원을 둘러보며 설명을 들으니 영화가 복기되는 것 같고, 새로운 사실들도 추가로 알게 되어 의미있는 자리였다"고 말했습니다.
2023년 12월 12일에 대전현충원을 둘러본 참가자들은 답사를 마치며 반란군과 진압군이 나란히 묻혀 있는 곳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단체 사진에서 참가자들이 대부분 장태완 장군의 묘 앞으로 모여들었던 모습을 보니 44년 전 12.12군사반란에 성공한 이들은 자신들의 성공가도를 자축하기 위해 기념사진을 찍었지만, 이날 참가자들의 단체사진은 지금도 역사 반란을 기도하는 시도에 맞서 당당한 진압군이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습니다.
▲ 2023년 12.12날 대전현충원 답사를 마치며 참가자들은 반란군과 진압군이 나란히 묻혀 있는 곳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 정성일 |
[참고 자료]
-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 정승화 <12.12 사건 정승화는 말한다> 까치, 1987
- 장태완 <12·12 쿠데타와 나> 명성출판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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