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식이' 소리 피하려다 제2의 신혼을 삽니다
[곽규현 기자]
"너희 남편 퇴직할 때 되지 않았니?"
"그래, 우리 남편 은퇴했어. 은퇴한 지 좀 됐어."
"너희 남편도 '삼식이'니... 같이 지내려면 힘들겠다."
내가 은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아내가 친구와 나눈 대화였다며 들려준 이야기다. 퇴직한 남편과 집에서 24시간을 어떻게 같이 지낼지, 친구가 걱정하며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 아내가 스치듯 언급한 '삼식이'이란 용어가 머리에서 좀처럼 떠나질 않아 우울한 며칠을 보냈다. '삼식이'라니, 삼식이는 집에서만 머물며 매 끼니 아내에게 아침, 점심, 저녁 세끼 식사(三食)를 다 차려달라고 요구하는 남편을 이르는 단어가 아니던가.
듣자하니, 여기에 대한 우려가 생각보다 많다고 한다. 다른 친구들이나 지인들 모임에서도 남편의 퇴직을 앞둔 여자분들이 퇴직 이후에 부부가 어떻게 함께 잘 지낼 수 있을지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한다는 거다.
집밥 자주 먹는 게 '삼식이'라니
▲ 쌓인 설거지들(자료사진). |
ⓒ 픽사베이 |
수십여 년을 가족들을 위해 직장에서 싫은 소리 들어가며 궂은 일도 마다않고 일하다가, 퇴직한 남편들에게 주변에서 당장 '삼식이' 딱지부터 붙이고 보는 것은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가 않다. 하지만 일터에서 가정으로 돌아온 남편들이 하루 종일 집에 머물며 갑자기 세 끼니를 꼬박꼬박 챙겨달라고 하는 상황, 더구나 아내가 세 끼니 모두를 차려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아내 쪽에서도 불만이 쌓일 만도 하다.
어쨌거나 퇴직한 남편들이 할 일 없이 집에서 빈둥거릴 걸 예상하여 '삼식이'이라 칭하는 데는, 서로가 불편한 부부 사이의 씁쓸한 풍경이 담겨 있다.
이런 현실 때문인지 은퇴를 한 주변의 선배들이나 친구들을 보면 종일 집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살림살이가 팍팍한 사정 때문에 눈높이를 낮추어 낮은 임금에도 재취업을 한 사람이 많다. 혹은 자신들의 특기나 취미를 살려 지역 사회에서 음악, 그림 같은 예능 분야의 재능 기부 활동을 하거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지역 소모임에 참여하는 지인들도 있다.
등산이나 운동으로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있고, 텃밭에서 채소 재배로 소일하다가 간단하게 점심까지 해결하고 오후 늦게 귀가하는 이웃 동년배도 봤다. 모두들 은퇴 후 저마다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시간을 활용함으로써 집에만 눌러앉아 있는 '삼식이'가 되지 않으려는 의지가 역력해 보인다.
은퇴 전후의 변화
나도 은퇴 후에 텃밭을 가꾸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등 이런저런 활동을 하면서 바깥 생활을 많이 한다. 그럼에도 끼니를 집에서 때우는 경우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은퇴 직후에는 종전처럼 별 생각 없이 아내가 차려주는 음식을 먹다가, 시일이 좀 흐르면서 아내의 볼멘소리가 잦아지고 내 마음도 불편해졌다.
▲ 식사 후 설거지를 하는 모습 |
ⓒ 곽규현 |
그런데 은퇴 후 바깥 활동을 한다고는 하지만 막상 은퇴 이전보다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고 집밥을 먹는 끼니가 많아지면서, 그냥 바깥 활동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안일과 부부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했다.
내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서라도 아내가 주로 해왔던 가사 노동에 동참하기로 했다. 집안 청소를 할 때는 내가 청소기를 밀고 아내는 밀대 걸레질을 한다. 아내가 세탁기를 돌리면 빨래를 널고 개는 것은 내가 한다. 집안 쓰레기를 분리하고 배출하는 것도 함께한다. 아내가 요리를 하면 나는 옆에서 지켜보고 보조를 한다.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도 번갈아서 한다.
집안일 나눠 하니 더 돈독해진 부부 사이
집안일을 아내와 함께 나눠 하면서, 우리 부부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다. 아내와 함께하는 집안일들이 하나의 놀이처럼 부담이 없다. 집안일도 일이어서 이게 항상 좋을 수는 없지만, 아내는 내가 바깥에서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도 집안일을 나누어서 하니 마음이 더 편해진 듯하다. 이제 우리 부부는 같이 있는 시간들을 불편하기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아내도 내가 없이 혼자 사는 세상은 상상하기 싫다 하고, 나 역시 아내 없는 세상은 생각하기 싫다. 나이가 들어가니 언젠가는 우리가 원치 않는 이별의 순간이 오겠지만, 지금은 함께하는 이 시간들의 행복을 이야기하며 웃는 날이 많다. 각자 일은 따로, 집안일은 같이 하는 생활에 적응되면서 진정한 인생의 동반자가 된 느낌이다.
아내가 해왔던 집안일을 같이 하다 보니 매일 반복되는 가사 노동이 만만치 않음을 실감하고 있다. 특히 하루 세 끼를 준비하여 먹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끼니마다 음식을 마련해야 하고, 먹던 반찬이 떨어지면 새로운 반찬을 만들어야 하고, 매번 똑같은 음식은 물리니 메뉴를 바꾸어야 되고... 먹거리 고민에다,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도 해야 하고, 여기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까지 처리해야 한다. 이런 게 끼니마다 되풀이되는 일상이니 가사 노동에 주부들이 지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은퇴 이후 '삼식이' 남편에다 경제적 어려움이 겹쳐서 그런지 최근 50세 이상의 황혼 이혼이 증가 추세에 있다고 한다. 오죽하면 20~30년을 함께 살아온 부부가 이혼을 할까 싶지만, 사실 늙어갈수록 노년의 쓸쓸함과 외로움은 더해진다.
▲ 아내와 함께 집 근처의 하천 산책로를 손잡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 |
ⓒ 곽규현 |
나는 요즘 집안일을 같이 하면서 아내의 수고로움을 몸소 느끼고 아내에게 더 자주 나의 속마음을 전하려고 애쓴다. 아내도 화답하듯 나에게 좀 더 신경을 쓰고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고 노력한다. 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자며 서로 다독이고 있다.
자식들도 다 외지로 떠나고 우리 부부만 남은 집에서, 이제는 제2의 신혼으로 살고 싶다. 오늘 저녁은 아내에게 나의 정성을 듬뿍 담아 내 손으로 직접 요리한 한 끼를 차려주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실릴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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