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자 실명으로 풍자하는 세계 영화, 한국은 뒤처졌다

김성호 2023. 12. 13.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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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607] <더 퀸> 과 한국영화들

[김성호 기자]

왜 전두환은 전두광이고(<서울의 봄>), '또 하나의 가족'은 '또 하나의 약속'이 되는가(<또 하나의 약속>). 왜 김재규는 김규평이 되고 김형욱은 박용각이 되는가(<남산의 부장들>). 어째서 노무현은 송우석이라 하고(<변호인>), 박정희는 그저 이름 없는 통치자이거나(<효자동 이발사>) 짤막하게 박통(<그때 그 사람들>)이라고만 불리는가 말이다.

모두가 그러한가. 아니다. 미국 최악의 대통령이란 소리까지 듣는 닉슨은 그래도 닉슨이고, 가장 부패한 정보조직 수장으로 불린 후버는 그래도 후버다(<닉슨>). 굴지의 화학기업 듀폰의 범죄행위는 그대로 듀폰의 범죄라고 언급되고(<다크 워터스>), 해적에게 상선을 빼앗긴 일류 컨테이너 선사 머스크는 그래도 머스크인 것이다(<캡틴 필립스>). 부시 행정부 실세로 네오콘 수장이라 불렸던 부통령 딕 체니의 이야기는 실명은 물론 아예 실화임을 수시로 강조하기까지 한다(<바이스>).

반면 한국영화에선 '영화에 나오는 인명, 상호, 내용 등은 철저한 허구이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라는 자막을 수시로 마주한다. 구구절절 극영화가 허구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한국의 사정은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해외에선 이 자리에 'Based on true story'라고 짧게 적어둘 뿐이다.

해외 영화팬들과 이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영화가 상상이 가미된 픽션인 건 당연한 것인데 어째서 한국영화엔 그와 같은 자막을 넣는 것이냐 비웃음을 당하기 일쑤다. 한국 영화인은 용기도 야성도 없어서 지레 납작 엎드리는 것일까.

거침없이 풍자되는 엘리자베스 2세 
 
▲ 더 퀸 포스터
ⓒ (주)프라임 엔터테인먼트
 
미국과 유럽에선 실존 인물을 실명 그대로 등장시켜 비판하는 작품도 흔하다. 잘 만들어진 수많은 작품이 있다지만 개중 특별히 언급할 만한 영화도 몇 편쯤 있다. 현존하는 권력의 진면목을 까발리고 비판하는 모습에서 경외와 비슷한 감정까지 치솟게 되는 작품들이다. 영국의 유명 감독 스티븐 프리어스의 2007년 작 <더 퀸> 또한 그와 같은 경우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영화는 지난해 사망한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이야기다. 사망 15년 전, 건재하던 여왕을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끌어가 화제를 모았다.

엘리자베스 2세가 누구인가. 영연방 역사상 최장기 재임한 국왕으로, 세계 2차대전 이후부터 지난해까지 무려 70년간 영국을 통치한 주권자다. 헌법으로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명백히 한 한국과 달리 영국의 주권은 국왕에게 있다. 국왕이 국가의 주인으로, 입법과 행정, 사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이 법에 명시돼 있다. 모든 범죄로부터 항구적으로 면책되며 정부와 달리 피소되지도 않는다. 명예와 존엄의 원천으로 인정되어, 국가적 명예는 오로지 그의 수여를 통해 얻어지게 된다. 이 모든 힘을 역사상 가장 오래 누린 국왕이 바로 엘리자베스 2세다.

그러나 영화는 엘리자베스 2세를 미화하지 않는다. 미화는커녕 조롱이며 비난이 아닌가 싶을 만큼 냉정하고 냉철하게 그녀를 그려낸다. 여왕이 이 영화를 보았다면 참아내기 쉽지 않았을 법한 장면도 여럿이다. 앞서 언급한 존엄은커녕 고집으로 똘똘 뭉친 할머니가 왕실 전체를 틀어쥐고 모든 일을 감정적으로 처리하는 모습이 수시로 펼쳐지는 때문이다. 여느 여염집 아주머니처럼 늦은 밤 잠옷을 입고 티비에서 나오는 소식에 열을 올리는 엘리자베스 2세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일상성마저 금기를 깨뜨리는 일이 되는 것을, 영화는 며느리의 죽음과 그 뒤에 따르는 국왕의 하찮은 분노를 가감 없이 까발려내는 것이다.

영국 왕실 둘러싼 민망한 사건, 적나라하게 다뤄
 
▲ 더 퀸 스틸컷
ⓒ (주)프라임 엔터테인먼트
 
영화는 다이애나 왕세자비 사망사건 이후 몇 달을 배경으로 한다. 엘리자베스 2세(헬렌 미렌 분)가 며느리인 다이애나를 못마땅해 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자유분방한 태도와 말씨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조차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니, 어느 호사가는 엘리자베스 2세가 대중 앞에서 다이애나와 같은 인기를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주장하기도 했던 일이다.

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고 이혼한 상태다. 이혼의 직접적인 이유는 알려진 그대로다. 찰스 왕세자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고, 다이애나는 남편의 외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왕실은 다이애나를 감싸주지 않았고, 다이애나 또한 참고 살지 않았다. 이혼은 흠이 되지 않았다. 영국은 물론 전 세계 언론의 관심이 쏟아져 다이애나를 전보다 더한 명사로 만들었다. 그 일거수일투족이 대중 앞에 보도되는 광경이, 또 대중들이 그녀를 안쓰러워하면서 왕실에 대해선 비판을 쏟아내는 모습이 여왕의 눈엔 고깝게 보일 밖에 없었다. 그러다 다이애나가 아랍계 남자를 사귀며 찢어진 고부의 갈등은 더욱 커져가기만 한다.

영화는 다이애나가 프랑스에서 자동차사고로 애인과 함께 사망한 뒤, 그 처리문제를 두고 정부 내각과 왕실이 보이는 상반된 태도를 흥미롭게 포착한다. 이제 막 영국 총리가 된 토니 블레어(마이클 쉰 분)는 여론을 감안하여 다이애나의 장례를 격식 있게 치르자는 쪽이다. 하지만 여왕이 그를 받아들일 리가 없다. 이혼으로 출가외인이 되었다는 듯, 그녀의 가족이 알아서 하면 된다는 것이다. 조기 하나 걸지 않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일관하는 왕실의 모습은 전 국민적 공분을 자아낸다. 수많은 영국인이 버킹엄 궁전 앞으로 몰려가 문 앞에 꽃을 두고 다이애나를 추모한다.

이를 보기 싫다는 듯 궁을 떠나 별장으로 행차한 국왕이다. 갈수록 여론은 나빠져만 가고, 엘리자베스 2세를 비롯한 왕실의 냉정한 처사에 비판이 쏟아진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블레어는 엘리자베스 2세를 설득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그녀를 비판하는 부하들 앞에서 화를 내면서까지 그녀를 이해하려 드는 것이다. 전쟁을 겪은 세대가 갖는 특수성을, 그 굽힐 줄 모르는 외골수 성품을 새로운 세대가 이해해야 한다며 왕과 국민 사이에서 중재자를 자처한다.

거침없는 예술의 효과, 한국도 누려야
 
▲ 서울의 봄 스틸컷
ⓒ 플러스엠엔터테인먼트
 
흥미로운 건 영화가 블레어에게 보이는 호의적 태도와 달리 국왕 엘리자베스 2세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왕이 등장하는 수많은 작품이 그 위엄을 훼손하지 않으려 왕의 내밀하고 인간적인 감정과 생활을 잡아내지 않았던 반면, 영화는 여왕의 초라하고 못난 모습조차 감추려 들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영국 국민을 넘어 영화를 보는 이들이 여왕을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효과를 낳는다. 물론 그중 적잖은 수가 영화에서도 언급되었듯 이 시대에 국왕이란 존재가 과연 필요한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더 퀸>은 여러모로 민감한 영화일 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영화는 더욱 가치 있게 평가되어야만 한다. 죄업을 법으로써 심판받고, 전 국민적 비난을 산 독재자마저 영화 가운데 제 이름 그대로 세우지 못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한국이 문화강국이며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라고들 말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전두환을 전두환이라 하지 못하고, 노무현을 노무현이라 하지 못하는 이 나라의 현실이 얼마나 민망한가 말이다.

물론 현대사를 다루는 일은 민감할 밖에 없다. 현대사 속 부조리의 원흉이, 또 불편을 자아내는 무엇이 실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 중 상당수가 사회에서 행세깨나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부담을 갖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국제적 표준에 맞춘 재정비 시급
 
▲ 또 하나의 약속 스틸컷
ⓒ OAL
 
이와 관련해 한국 법의 문제를 돌아보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법이 문제가 있다면 세계적 흐름에 맞게 법을 고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고, 문제가 없다면 창작자와 제작자들이 만들어가는 문화를 탓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백경태 변호사(법무법인 신원)는 "미국은 한국과 달리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대한 규정이 없고, 대부분 주 역시도 명예훼손은 민사상 손해배상의 문제로 다뤄질 뿐 형사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사정이 다르다"며 "한국에선 기본적으로 명예훼손 문제와 상표권, 저작권 침해문제가 제기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최근 글로벌 OTT에 제공되는 작품들의 경우, OTT 플랫폼사들이 작품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양수하면서 제작사들에게 법률적 문제가 없을 것을 선제적으로 요구하는데, 이 과정에서 제작사가 인물의 이름, 초상권, 상표권, 저작권 등에 대해 더욱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법률적으로 해결하는 것만 능사는 아니겠으나, 보다 자유로운 제작 환경 및 작품의 제작과 소비를 위해서도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여러모로 한국 영화계는 사실의 재현과 비판의 측면에서 국제적 표준과 크게 벗어나 있다. 이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동안 예술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긍정적 영향 또한 크게 줄어들 밖에 없다. 이 같은 문제를 들추어 바로잡아야 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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