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이태원에서 재탄생한 퀴어들의 '은신처'

김상목 2023. 12. 13.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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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홈그라운드>

[김상목 기자]

권아람 감독은 지속적으로 사회적 마이너리티에 천착하는 작업을 진행해 왔다. 물론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경향으로 보면 딱히 드문 사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주제의식을 일관되게 '공간'을 배경으로 풀어낸다는 점에서 감독의 작업은 독자적 지층을 꾸준히 쌓아나간다.

감독의 이름을 각인시킨 <퀴어의 방> (2018)은 '정상가족'의 '집'이라는 공간이 퀴어 당사자들에겐 그 단어가 주는 안정감 대신 질식과 억압으로 다가왔음을, 그리고 그로부터 벗어나 자신들만의 피난처로서의 '방'을 갖게 되는 과정과 소회를 단계별로 조명하는 작업이었다.

4년 후 선보인 본 작품 <홈그라운드>는 전작의 '피난처'가 갖는 방어적 개념에서 제목의 원래 어원처럼 '근거지' 혹은 '본거지'로서 보다 선명하고 공공적인 의미를 지닌 공간에 대한 소개이다. 일관되게 감독이 지향해온 방향성을 대폭 전진 배치한 도전인 셈이다.

알려지지 않은 '이반'들의 근거지 변천사
 
▲ "홈그라운드"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영화는 이태원에 소재한 여성전용 바 '레스보스'와 그 공간을 지키는 '명우형'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면서 시작된다. 공간과 인물은 떼어낼 수 없는 화학적 결합처럼 느껴진다. 퀴어들의 은신처 혹은 요새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태원 한구석에 존재하는 공간과 주인장에 대해 간략히 소개한 뒤에 영화는 곧이어 이런 '근거지'의 역사에 대해 짧은 해설을 시작한다. 그를 통해 어느 날 문득 색안경을 낀 이들이 폄하하는 것처럼 외국 문화의 부정적 전파나 퇴폐방종 흐름의 일시적 유행이 아닌, 한국 현대사 내내 존재해온 소수자 커뮤니티의 존재를 소개한다. '뿌리' 찾기의 과정으로 말이다.

물론 <홈그라운드>는 역사 교육 용도로 제작된 작업은 아니다. 그래서 아주 간략하게 몇몇 결정적 지점을 교차시키는 것으로 과잉된 해설로 치달을 유혹을 벗어난다. 선택과 집중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았을 테다. 그렇게 걸러낸 결과 정리된 건 1970년대 명동의 '샤넬다방'과 21세기 초 전후의 '신촌 공원', 1990년대 중반 홍대 부근에서 탄생했다 사라졌지만 2019년 이태원에서 재탄생한 '레스보스'로 이어지는 반세기의 역사다. 알음알음 해당 시간대의 일부는 세대별로 공유되어 왔지만 물리적 시간 흐름으로 볼 때 3세대 쯤 아우르는 각 공간들의 흥망성쇠를 한번에 통합하는 정리는 그 자체로 희소성을 지닌다.

레스보스의 주인장 '명우형'은 60대 중반이 된, 마치 실러캔스처럼 '살아있는 화석' 급의 레즈비언(혹은 수술하지 않은 FTM 트랜스젠더)이다. 그는 70년대 명동 샤넬다방의 기억을 간직한 것은 물론 그 세대의 막내로서 자신이 교류했던 선배 '바지씨'들을 제작진들에게 소개하는 가교 역할을 수행한다. 그의 궤적을 따라서 우리는 그저 새마을운동과 군부독재 통치시기로만 회고되곤 하는 해당 시기의 스테레오 타입 이면에 감춰진 수많은 결의 하나를 간접체험하게 된다. 실제 당사자 인터뷰와 당시 언론보도에 상황 재연 영상까지 더해져 잊힌 시공간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다음의 시간대는 1990년대 대학가를 중심으로 다시 페미니즘과 퀴어 관련 흐름이 형성되던 기간이다. 이 시기에 '레스보스'의 첫 시간이 출발했고 명우형이 '섬지기'로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다. 실내에 안정된 근거지를 구하지 못한 청소년 퀴어들이 도심의 소공원으로 모여들고 그런 그들이 레스보스 같은 공간으로 만나는 과정이 동일한 형태로 소개된다. 당시 10대부터 20대에 속했던 당사자 상당수가 여전히 관련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는 중이다. 그리고 다시 초점은 레스보스로 돌아온다. 반세기 동안의 장구한 역사가 간결하게 개괄된 후로 다시 명우형과 레스보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틀을 잡고 흘러간다.

아래로부터의 대안적 역사서처럼 기능하는 작업
 
▲ "홈그라운드"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한국역사에서 '퀴어'는 (다른 문화권처럼) 고대로부터 목격되어온 현상이다. 하지만 드문드문 언급되는 것 외에 현재 흐름과 연속성을 지니는 지점이라면 아무래도 근대 개화기 이후가 될 테다. '모던보이'들이 자유연애를 빙자해 자신들의 사회적 활동의 기반이 된 시골의 경제적 기반과 그곳에서 가문의 전통에 의해 조혼으로 맺어진 아내를 방치한 채 '모던 걸'과 외도하는 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치부되곤 했다.

그에 비해 '신여성'들의 자유연애는 방종과 타락으로 치부되며 도덕적으로 단죄되었다. 이런 차별적인 잣대에 대항하는 흐름으로 여성-여성 연애가 수면 아래에서 활성화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연대이기도 했다. 이후 다양한 사회적 억압에 대항하는 일련의 흐름은 꾸준히 지속되고 그런 움직임이 위협적으로 다가오면 공권력의 탄압이 가해지는 패턴 역시 반복되었다. <홈그라운드>에서 소개되는 공간들의 운명 역시 그러했다.

어느 책 제목처럼 <홈그라운드>는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라는 주제에 충실한 구성을 취한다. 명우형은 60대 중반이지만 70년대 명동 샤넬 다방에선 막내 축에 들었었다. 즉 그 위로 아직 외래어인 '레즈비언'이나 '퀴어' 같은 용어가 제대로 도입되기 전부터 그와 같은 존재들이 은폐되었을 뿐 한국사회 어딘가에서 집단적으로 교류하며 유지되어 왔다는 산증인인 셈이다. 70대 '바지씨'들의 등장은 그래서 이 영화가 전혀 충격효과나 선정적 표현을 구사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꽤나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쭉 진행되는 역사적 시공간의 소개를 통해 70대부터 60-50-40-30대로 차례로이어진 중견(!?) 퀴어들의 연속성이 하나의 서사를 완성시킨다.

샤넬다방의 불과 2년 남짓 짧은 존속기간 동안 자신이 그저 저주받은 '별종'에 불과하지 않나 고뇌하던 당사자들이 해당 공간에서의 교류를 통해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각성에 도달했다. 비록 부당한 매도와 마녀사냥 격 탄압으로 공간은 해체되지만, 한번 각성한 그 존재들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교류를 유지한 덕분에 다음 세대 동료들이 만날 수 있게 된 건 물론이다. 그들이 점점 더 결집하고 도모할 수 있게 된 과정이 차례로 형상화된다. 사적 만남을 넘어 단체와 조직을 꾸리는 과정에서 시대별로 존재했던 '홈그라운드'들이 어떤 역할을 해왔고 특출한 가치를 형성했는지 지층처럼 관객의 머릿속에 축적되는 과정이 러닝타임 내내 이어진다. 대안적 역사서의 성격을 명백히 소화하는 부분이라 하겠다.

하지만 여기에서 명우형에게 다시 집중되는 카메라는 이제 그런 공적 공간을 지탱하기 위해 누군가는 치러야 했던 대가와 희생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겉보기엔 또래들에 비해 젊게 살고 씩씩하기 그지없는 명우형이다. 하지만 대신에 동세대의 '일반'들이 전제하는 삶의 보장은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다. 사방으로 가난과 불확실성, 외로움이 가득한 황혼의 일상이 비춰지면서 주인공이 품은 '달의 어두운 면'이 극대화된다. 누구나 레스보스에서 호탕대담한 명우형을 기대할 뿐, 그가 짊어진 무게를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당사자는 한순간도 벗어보지 못한 멍에가 펼쳐지는 순간이 도래한다.

'근거지'를 사수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하여

물론 제작진은 자신들이 명우형의 모든 고뇌를 온전히 다 전달할 수 있다고 오만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결국 명우형만이 소화해야 하고 남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 섬세한 태도는 출퇴근길을 조명하는 카메라가 명우형의 거처 입구에서 멈추는 것으로 확인된다.

전형적인 방송 다큐멘터리의 시선이라면 주인공의 사적 공간으로 기어코 카메라를 들이밀고자 시도했을 테지만 <홈그라운드>의 카메라는 그런 저격수의 본능 대신에 동료이자 대선배이기도 한 캐릭터의 침잠을 존중하는 배려로 승화된다. 그렇게 (버지니아 울프의 저 유명한 저작처럼) '자기만의 방'에서 휴식을 취한 명우형은 다시 당당한 걸음으로 '퀴어의 방'을 나서서 자신의 영토를 개방할 기운을 충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명우형의 출근길은 곧바로 레스보스로 향하는 게 아니다. 팬데믹 여파로 현상유지도 힘든 운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그는 '투 잡, 쓰리 잡'을 뛰어야만 한다. 자신이 손이 빨라 김밥을 아주 빨리 말 수 있다는 호탕한 목소리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쇠약해진 육체의 토로가 이어진다. 김밥 집에서 오랜 노동을 통해 하루하루 생계를 위한 방편 마련한 뒤에 명우형은 비로소 약속의 땅 '레스보스'에 당도할 수 있다. 그제야 또 하루분의 '명우형'과 '레스보스'의 시간이 이어진다. 하지만 시련이 그 정도로 끝날 리 없다.

평상시에도 겨우 현상유지에 급급해 왔건만, 어렵게 공간을 다시 열게 된 게 2019년, 동시대 누구나 쉽게 인지하듯이 곧이어 팬데믹의 시간이 도래하고 만다. 명우형은 어렵게 재건한 '근거지'가 어떤 기능과 역할을 소화하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이 공간을 버릴 수가 없다. 그 대신에 그가 감내해야 할 것은 너무나 가혹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벌리는 것도 쉽잖다. 거의 처음으로 명우형은 좌절과 회한을 육성으로 토로하기에 이른다. 해당 장면들을 보고 뜨끔해할 이들도 몇 됨직하다. 우리는 자주 소중한 공간과 책임을 짊어진 이들의 노고를 당연히 원래부터 자연적으로 존재한 것 마냥 치부하곤 한다.

후반부에서 제작진의 카메라는 그런 명우형의 고뇌와 수난, 그리고 이겨내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과 그에 호응하는 주위의 참여를 연대의 정으로 조망해나간다. 이 역전의 '바지씨'가 몇 세대 후의 (호칭은 달라졌지만 본질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다양한 '이름'으로 호명되는 동족들과 만나는 극적인 순간들을 꼼꼼하게 풀어낸다. 명우형은 노구의 몸으로 깃발을 들고 거리에 나선다. 자신들이 '정신병'이나 '돌연변이'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내내 우리 사회 어딘가에 존재해 왔음을 증명하려는 명우형의 분투가 막바지를 장식한다.

수천 년 시간과 거리를 초월한 '레스보스'의 상징성
 
▲ "홈그라운드"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씨네소파
 
여기에서 제작진은 명우형의 일평생 고투가 헛되지 않았다는 증빙을 우정 가득한 시선으로 풀어내려 도전한다. 일종의 진한 격려사 차원처럼 영화는 또 다른 '홈그라운드'를 소개하는데 일정부분을 할애한다. 30대 퀴어 당사자가 운영하는 댄스 스튜디오 '루땐'의 존재감이 그것이다.

성소수자들이 주변의 색안경과 관음증적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춤을 발산할 수 있는 숨은 요새다. '루땐' 역시 코로나19로 인해 운영상의 어려움에 봉착했지만 그 작은 공간이 지닌 대체하기 힘든 역할을 소명으로 받아들였기에 지속 가능했음을 전한다. 자신 또한 레스보스나 신촌 공원을 경험하며 선배 당사자들의 은덕을 체감했다는 운영자의 이야기는 레스보스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비장의 패로 활용된다.

이 영화가 조명해온 역사적 '홈그라운드'들 중에도 가장 핵심은 명우형이 수문장처럼 수호하는 '레스보스'임은 명백하다. 이 요새와도 같은 '근거지'의 명칭은 처음 작명할 때부터 의도가 명백했을 테다. 바로 기원전 7세기 튀르키예 앞바다 레스보스 섬에서 시인 '사포'가 뜻을 함께 하는 여인들을 모아서 꾸렸다는, 수많은 전설과 민담에 오르내리지만 실체적 진실은 다소 모호한 신화적 시공간의 그것이다. 2천 년이란 시간과 대륙 반대편이란 공간의 이격을 초월해 현실의 장벽 속에서 온갖 시도 끝에 어렵게 숨죽이고 만나게 된 '이반'들에게는 그 신화성이 하나의 염원이자 희원이었음은 당연하다.

그렇게 현대 한국사회에서 거듭 자리를 옮겨가면서 명맥을 유지해온 여러 다른 이름들의 '레스보스' 중 대표 격 공간들을 애써 갈무리한 결실이 <홈그라운드>에 집약된다. 그 공간을 지켜온 수많은 '명우형'들의 계보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음으로 선사해주는 건 덤이다.

여기에 사족을 덧붙이자면, 막판에 명우형이 여전히 이 사회에 온존한 다양한 종류의 차별에 맞서 커밍아웃을 두려워않는 것에서 조금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흥미로운 접근법일 테다. 21세기의 레스보스 섬에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난민수용소가 존재한다. 성소수자들에겐 자신들의 기원이 된 신화의 땅이 현재 세계가 직면한 가장 큰 차별 중 하나를 품은 채로 현존하는 셈이다. 명우형이 일평생 던져온 차별에 대한 저항과 레스보스 섬의 현재 상황 또한 묘하게 연결된다는 것 역시 너무나 상징적이다.

<작품정보>

홈그라운드 Home Ground
2023|한국|다큐멘터리
2023.12.06. 개봉|84분|12세 관람가
감독 권아람
출연 윤김명우, 최옥진, 윤수, 전해성, 루시아, 이드 그리고 레스보스
배급 씨네소파

2022 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관객상, 신진감독상(후원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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