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100권, 전공 대신 토론” 세인트존스대학에 한국 교육을 묻다 [쿠키인터뷰]
전공도, 강의도 없다. 미국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와 뉴멕시코 산타페 두 곳에 캠퍼스를 둔 세인트존스 칼리지엔 특별한 교육과정이랄 것이 없다. 대신 인문·자연과학 고전 100권을 읽고 공부해야 졸업할 수 있다. 이렇게 학습한 졸업생들은 법률,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 스카우트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한국 학생들에게도 손꼽히는 인기 외국 대학이다.
“세인트존스 칼리지는 전공 없이 모든 학생이 똑같은 (자유교양학사) 학위를 받는 리버럴 아츠입니다. 모두가 인문학과 수학·과학 고전을 같은 비율로 읽고 실험하고 토의합니다. 인문학과 수학·과학이 함양한 각각의 역량을 융합하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매우 실용적이죠.”
지난 11일 고전교육학술포럼 참석차 방한한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전 대학원장 에밀리 랭스턴 교수(대외협력분야 총장 겸 선임고문)를 인천 송도동 인천대학교 학산도서관(윤영돈 관장)에서 만났다.
랭스턴 교수에 따르면 세인트존스 칼리지 학생들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셰익스피어, 데카르트 등 고전부터 현재까지 중요한 작품을 졸업 때까지 1년에 25권 정도 읽고 토론하며 에세이를 쓴다. 그는 고전 읽기에 대해 “자기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세상을 뒤바꿀 정도의 새로운 생각을 해낸 위대한 지성들의 책을 직접 읽고 고민하는 과정”이라며 “다양한 문제를 이해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생각하도록 돕는다”라고 설명했다.
교수진 또한 평범치 않다. 각자 전공을 강의하는 일반 대학과 달리, 튜터로 불리는 세인트존스 칼리지 교수진은 모든 과목을 맡을 수 있어야 한다. 세미나에서 학생과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고 지식을 탐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튜터들은 매주 모여 과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끊임없이 연구한다.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닌 수업에 대해 도움을 받기도 한다. 랭스턴 교수는 이 과정을 “힘들지만 매우 흥미롭고 지적인 여행”이라고 표현했다.
랭스턴 교수는 기초교양을 근본으로 한 융합 교육과 토론이 현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실용적인 모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많은 이들이 현대 사회에서 코딩과 같은 실용 기술을 배우는 것이 직장의 안정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한다”라며 “하지만 인공지능(AI) 시대에는 특정 기술을 배우는 것만이 강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변하는 세상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다른 이들과 협력해 빠르게 학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코딩 같은 특정 기술을 배우는 것보다 더 필요한 교육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세인트존스 칼리지 졸업생들은 IT기업부터 의학, 법조계, 사회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진출한다. 미국 내 인문학 분야 박사생을 가장 많은 학교이며, 과학 분야를 포함해 다양한 범주의 박사학위 분야에서 상위 10% 안에 든다. 지난 몇 년간 미국 내 명문 법학대학원 지원자 전원이 합격했다. 그 중 가장 많은 졸업생이 진학하는 법학대학원은 하버드 법학대학원이다.
손잡은 대학·지자체, 한국형 토의식 세미나 확산
한국 학계도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세미나 모델을 주목하고 있다. 최근 해마다 한국 청소년들의 문해력 저하 우려가 커지고, 고등교육 글로벌 경쟁력이 떨어지는 현 상황을 극복할 방법을 찾기 위해서다. 세인트존스 칼리지와 MOU를 맺은 인천대학교(박종태 총장)는 지난 2019년부터 세미나 모델을 한국식으로 연구한 그레이트 북스(GB) 토의식 세미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세계 최초로 세인트존스 칼리지 세미나 모델을 도입한 정식 교육 기관이다. 이용화 인천대 영문학과 교수에 따르면 GB는 대학뿐 아니라 중·고등, 일반 시민 대상 토의 세미나로 매년 확대하고 있다. 또 한림대, 강원대 등 여러 대학, 지자체들과 손잡고 그레이트 북스 모델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랭스턴 교수는 최근 인천 송도동 채드윅 송도국제학교, 강원도 횡성군 민족사관고등학교(민사고)를 방문,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GB 시범 세미나를 진행했다. 민사고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경직된 분위기였지만, 세미나를 하는 동안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로 주제에 접근하는 모습에 놀랐다. 세미나가 끝날 때쯤엔 학생들이 즐긴다는 느낌도 받았다.
랭스턴 교수는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선 (한국형 GB 모델에) 굉장히 놀라고 반가워하는 분위기”라며 “직접 한국에 와서 보니까 교양교육에 대한 열망이 느껴졌다.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 “한국 학생들도 흥미로운 텍스트를 가지고, 너무 길지 않은 이야기를 토의하는 기회를 일주일에 1번이라도 제공하면, 자기 주도적이고 창의적인 능력을 키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지혜 기자 jihy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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