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들 아무렇지도 않지? 화산이 분화하는데.”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 나오는 대사다. 부모가 이혼한 뒤 가고시마의 외조모 집에 살게 된 소년, 코이치는 ‘사쿠라지마’ 산에서 분출하는 연기를 보면서 고개를 갸웃갸웃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12월 3일, 가고시마에 도착했을 때 시내에서 불과 4㎞ 거리에 활화산이 있는 걸 보고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나 사쿠라지마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가고시마의 중요한 관광 자원이다. 화산 덕분에 온천을 즐길 수 있고, 화산재가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맛난 농산물도 길러낸다. 활화산을 보며 걷기여행을 즐기는 이색 체험도 가능하다. 한국 프로 축구팀, 야구팀의 겨울 전지훈련 장소로도 인기인 가고시마는 그냥 온화한 동네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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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4㎞ 거리에 활화산
가고시마(鹿児島) 시는 일본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 현의 현청 소재지다. 인구는 약 60만 명에 달하는 중소도시로, 어디서나 보이는 사쿠라지마가 도시의 상징이다. 사쿠라지마(桜島)는 이름에 섬(島)이 들어가지만 지금은 섬이 아니다. 1914년 대분화 때 용암이 흘러내려 동쪽 반도와 이어졌다. 사쿠라지마는 일본의 36개 지질공원 중 하나다. 독특한 지질 자체가 볼거리라는 말이다. 동쪽 산악 지역에서는 접근이 쉽지 않지만 가고시마 선착장에서 24시간 페리가 다닌다. 소요시간은 15분. 선내에서 우동 한 그릇 사 먹으면 도착한다.
관광객 대부분은 순환 버스를 타거나 자전거를 빌려 산책을 즐긴다. 항구에서 출발하는 ‘아일랜드 뷰 버스’를 타봤다. 천장까지 유리로 돼 있어 차창으로 쪽빛 바다와 산이 시원하게 보였다. 압권은 해발 373m에 자리한 유노히라 전망대였다. 일반인의 출입을 허용한 가장 높은 전망대다. 침엽수 우거진 숲 뒤편에 금방 용암이 흘러내렸다가 굳은 것 같은 시커먼 산줄기가 보였다. 최고봉 온타케 뒤편에서 뭉게구름처럼 연기가 피어올랐다. 진원지는 쇼와 화구다. 항구 인근에는 무료 족욕장이 있었다. 바다와 산을 감상하며 따뜻하게 발을 데우니 기분 좋은 나른함이 몰려왔다.
사쿠라지마는 날마다 작은 분화가 일어난다. 수년에 한 번씩 불기둥이 보일 정도의 폭발이 일어난다. 화산재가 가고시마 시내까지 날리기도 한다. 가고시마에서 나고 자란 토모 이노우에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 자동차에 먼지가 쌓여서 좀 성가시긴 하다”고 말했다. 사쿠라지마 기슭에 약 4000명이 산다. 여기서 재배한 귤과 무는 일본 최상품으로 알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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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찜질 즐기고 기모노 체험까지
가고시마는 체험 거리가 다채롭다. 시내에서 차를 타고 약 1시간 30분 남쪽으로 내려가면 일본 본토 최남단 갯마을 ‘이부스키(指宿)’가 나온다. 해변 모래찜질로 유명한 동네다. 모래찜질 업체 두 곳 가운데 고급 료칸인 ‘하쿠스이칸(白水館)’이 한국에 잘 알려졌다. 고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2004년 여기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두 정상은 여러 현안을 논의했고 1000그루 소나무와 야자수가 조화를 이룬 정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회담을 마친 뒤 노 대통령 부부는 료칸에서 하룻밤 묵었다.
이달 4일 하쿠스이칸 모래찜질을 체험해봤다. 가운을 입고 모래에 드러누웠다. 곧 사내들이 삽으로 모래를 푹푹 퍼서 머리만 남기고 덮어버렸다. 뜨거운 온천수가 모래 밑에 흐른다던데 50℃에 달하는 모래는 정말 뜨거웠다. 땀구멍이 다 열리고, 피가 발끝까지 고속으로 순환하는 기분이었다. 5분만에 온몸이 땀으로 다 젖었다. 독소가 다 빠져나간 듯했다. 온천탕이나 찜질방에 들어간 것과는 뭔가 달랐다. 찜질을 마친 뒤 정원을 산책하고 일본으로 끌려온 조선 도공이 만든 명품 도자기를 전시한 박물관도 구경했다.
가고시마는 일본 최상급 명주로 기모노를 만드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 섬에서 만든 특산품인 ‘오시마 명주’의 명맥을 잇는 업체가 가고시마 시내에 있다. 기모노를 빌려 입을 수도 있고 1000년 이상 이어져 온 기모노 제작 공정을 볼 수도 있다. 오시마 명주는 기모노를 잘 모르는 사람 눈에도 대도시 관광지에서 싼값에 빌려주는 것보다 훨씬 고급스러워 보였다. 에도 시대, 왕에게 바쳤다는 진상품답게 가격은 한 벌 500만원이 넘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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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대 오마카세, 엔저 시대의 행복
가고시마 도심 여행도 의외로 흥미롭다. 복고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트램을 타고 최대 번화가 텐몬칸(天文館)을 찾아가 맛집을 순례하거나 쇼핑을 즐기다 보면 반나절이 후딱 지나간다. 가고시마는 일본 고구마 생산량의 40%를 책임진다. 고구마로 만든 각종 디저트와 고구마 소주가 유명한 이유다. 참마를 넣은 간식 ‘가루칸’도 선물용으로 인기다. 영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에서 코이치의 할아버지가 가루칸을 만든다.
경기도 면적에 맞먹는 가고시마 현은 축산도 주요 산업이다. 하여 고기 맛이 정평이 나 있다. 특히 흑돼지가 유명한데 텐몬칸에 샤부샤부 식당이 많다. 쿠마소테이(熊襲亭)에서 맛본 흑돼지 샤부샤부는 돼지 특유의 잡내는 없으면서도 감칠맛이 깊었다. 가고시마는 와규(일본 토종 소)도 유명하다. 지난해 열린 ‘와규 올림픽’에서 가고시마 현 와규가 가장 많은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올해 한국인 사이에서는 일본 여행 열풍이 불고 있다. 펜데믹 이후 보복 여행 열기에 더해 유례없는 엔화 가치 하락 때문이다. 가고시마 여행도 어느 때보다 높은 ‘가성비’를 누리기 좋은 때다. 숙소도 그렇다. 이를테면 올해 5월 개장한 5성급 호텔 쉐라톤 가고시마는 평일 2인실 1박 가격이 20만원 이하다. 객실에서 사쿠라지마 산이 훤히 보이고 지하 1000m에서 끌어올린 온천에 몸을 지진다. 뷔페식당은 점심 5000엔(약 4만5000원), 고급 일식당 ‘사쓰마그마’의 저녁 코스 요리는 6000~1만엔(5만4000~9만원)이다. 제철 생선 회와 흑돼지, 와규를 내주는 수준급 오마카세가 이 가격이라는 게 놀랍다. 요즘 서울의 특급 호텔 뷔페는? 15만~19만원선이다.
■ 여행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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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시마의 12월 기온은 5~15도 정도다. 대한항공이 주 3회(일‧수‧금) 인천~가고시마 노선에 취항한다. 비짓재팬(Visit japan) 웹사이트에서 개인정보를 입력하면 입국 절차가 빠르다. 사쿠라지마 페리, 시내 대중교통을 두루 이용한다면 ‘큐트’ 티켓을 권한다. 관광안내소나 기차역에서 판다. 1일권 1200엔, 2일권 1800엔. 쉐라톤 가고시마에 묵으면 이부스키 모래찜질, 기모노 체험, 보트 투어 등 주요 관광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