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신가요?
겉으론 멀쩡해도 속은 곪아가
정부, 국민 정신건강을
국가 의제 삼고 비전 선포
의미 크나 구호에 그쳐선 안돼
남은 한해는 다른 사람 아닌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 되길
밥 먹을 시간도 아껴가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온 청년은 7년째 단 몇 문제 차이로 고배를 마신다. 포기하기엔 쏟은 시간과 노력이 아깝고, 계속 도전해도 닿을 듯 말 듯 합격은 손에 잡히지 않는다. 현실에 절망한 그는 게임 세계로 도피하고, 그렇게 망상증 환자가 됐다. 중학생 딸을 둔 워킹맘은 자신이 늘 부족한 엄마라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또다시 집안일이 시작되는 고단한 삶. 스스로의 행복에 눈 감고 산 지 오래지만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호평을 받고 있는 넷플릭스 시리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드라마를 보며 가슴이 찡했다. 모두 주변 얘기 같아서였다. 그들은 힘들지만 ‘괜찮아, 견디면 나아지겠지’ 하다가 많이 아프게 됐다.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은 곪고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 정말 괜찮은 걸까.
대한민국은 경제 수준에 비해 삶의 만족도가 대단히 낮은 나라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행복지수 하위권이라는 씁쓸한 지표가 이를 말해준다. 급속한 산업 발전을 겪으면서 가족 공동체가 붕괴되고 1인 가구는 늘어간다.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며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점점 없어진다. 청년은 청년대로, 중년은 중년대로, 학생은 학생이라 힘들다. 일터 배움터 삶터에서 받는 스트레스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정신건강에 경고등이 켜져도 대부분 치료를 주저한다. 정신병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편견 때문이다. 적절한 시기에 치료하고 약을 먹으면 낫는 병인데, 아직 그런 인식이 부족하다. 정신질환은 환자 개인이 인내하거나 나약함을 이겨내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렇게 개인 문제로 방치할 일이 아니다. 신림역 서현역 흉기난동 사건 등 개인의 정신질환이 사회적 위협이 되는 사례들도 빈발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데도 그동안 국가 차원의 관심과 투자는 거의 없었다. 1, 2차 세계대전 이후 혼란기에 개인의 정신질환 문제를 국가 문제로 접근해 온 선진국들과는 달랐다. 그런데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국민의 정신건강을 국가 어젠다로 삼고 적극 해결책을 강구하겠다고 나선 건 늦었지만 의미가 크다. 개인의 정신건강 문제가 ‘사회 안보’에 해당한다는 지적도 맞는 말이다. 대통령은 직속위원회를 설치해 정신병의 예방, 치료, 회복에 이르는 전 과정의 지원체계를 재설계해 정신건강정책의 패러다임을 획기적으로 바꾸겠다고 했다. 이대로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자칫 미사여구를 늘어놓은 비전 선포에 그치는 건 아닐까 우려스럽다.
정부 발표 후 나온 전문가들의 지적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중증환자의 치료와 퇴원 후 사후관리 대책이 아쉽다는 평가다. 외래치료를 통해 정신질환자의 사회 복귀를 돕는 외래치료지원제가 있지만 현장에선 유명무실하다. 의사가 “퇴원 후 병원에 잘 오셔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 이외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환자가 안 와도 그만이다. 외국은 대부분 사후관리에 법적 구속력이 있다. 현장에선 가장 급한 것으로 급성기 치료를 꼽는다. 자해나 타해 위험이 있는 경우 빠르게 입원 치료를 하는 게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마비 상태인 입원 시스템을 개선해야 하고, 응급을 필수의료분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정부는 대책이 실효성을 가질 수 있도록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인식 변화가 중요하다. 정신과 진료나 심리상담 경험이 불이익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감기에 걸리면 내과에 가는 것처럼 마음의 면역력이 떨어지면 정신과를 찾아야 한다. 드라마 대사처럼 “우리 모두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고, “누구든 언제든 약해질 수 있는 존재”이니까.
12월 중순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스스로의 마음이 안녕한지 돌아보면 어떨까. 내 마음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이를 해주는 것이다.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들을 만나거나, 실컷 웃을 수 있는 영화를 보는 식으로 말이다. 거절을 잘 못하는, 남을 지나치게 배려하는 성격이라면 좀 이기적이 될 필요도 있다. 내가 행복해야 주변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얼마 남지 않은 한 해는 다른 사람이 아닌 스스로를 돌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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