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엄두도 못 낸다…과다약물 극단선택자 살린 데이터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지난 9월 새벽에 40대 환자 A씨가 119 구급대에 후송돼 한 대형병원 응급실로 실려 왔다. 가족은 스무 알의 약을 삼킨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극단적 선택 시도자였다. 혈압이 최고 73, 최저 40으로 뚝 떨어져 있었다. 환자는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했다. 환자에게 상황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급하게 오느라 가족은 약을 챙겨오지 않았고 이름도 몰랐다. 집에 가서 약 봉투를 확인할 여유가 없었다. 의료진은 "심장 쇼크 위험이 높다"고 가족에게 알렸다. 수액을 공급했지만, 혈압이 68/42로 더 떨어졌다. 혈압·맥박이 떨어져 심장이 느리게 뛰는 심장성 쇼크 직전까지 갔다. 혈압을 올리는 약(승압제)을 쓸지, 해독제를 쓸지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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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료정보 응급 상황 활용 확산
진료 3년,투약 1년치 정보 모아
AI가 응급실 추천,뺑뺑이 사라져
"활용도 높이고 부처장벽 없애야"
」
의료진은 가족 동의를 받고 '응급진료 지원 데이터 서비스'에 접속했다. 환자가 먹은 약을 확인했고, 승압제를 투여했다. 환자는 서서히 회복했고, 며칠 입원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환자가 복용한 약은 다량으로 먹을 경우 혈압과 맥박을 떨어뜨린다고 한다. 다른 상급종합병원의 한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벤조다이아제핀 같은 향정신성 약을 다량으로 먹으면 해독제를 투여한다. 환자가 먹은 약을 빨리 찾아낸 덕분에 위험한 순간을 넘긴 것 같다"고 평가했다.
5088만명 진료 정보 활용
이 환자를 살린 '응급진료 지원 데이터 서비스'는 한국 건강보험의 힘을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한국은 전 국민 건강보험 체계를 갖췄고 이 덕분에 진료 정보가 한 곳으로 모인다. 의료 선진국인 미국은 민영보험 방식이어서 엄두를 못 낼 일이다. 응급 데이터 서비스는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운영한다. 그동안 진료 정보가 차곡차곡 쌓여 빅데이터가 되면서 이런 서비스가 가능해졌다. 심평원은 지난 6일 보건의료 빅데이터 미래포럼에서 성과와 대책을 공개했다.
한국인은 병원에 많이 간다. 지난해 진료받은 사람이 5088만명. 건수는 15억 4251만 1000건, 입원일수는 17억 403만일이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태아를 시작으로 수없이 건강검진을 받는다. 코로나19를 비롯한 예방접종도 적지 않다. 이걸 환자별로 통합하면 강력한 힘이 된다. 특히 응급상황에서는 큰 힘을 발휘한다. 대표적인 게 응급 데이터 서비스이다. 심평원은 의료기관별로 흩어져 있는 전 국민의 진료 정보(3년 치)와 투약 이력(1년 치)을 개인별로 통합 조회할 수 있게 했다. 응급실 의료진이 응급 상황 때 검색할 수 있다. 환자나 가족 동의를 받지만 그럴 상황이 아니면 의료진 판단에 맡긴다.
5000명 응급환자 회생 도와
2021년 9월 이 서비스를 시작해 5000명의 응급 환자 회생을 도왔다. 한해 응급환자 760만명에 비해 미미하지만 A씨처럼 긴급한 상황에서 값어치를 한다. 여행 중 응급 상황에서는 쓰임새가 더 크다. 지난 10월 말 강원도로 여행 간 60대 남성 환자(경기도 거주)가 9시간 동안 극심한 안구 통증을 앓다가 응급실을 찾았다. 가족이 "한 달 전 눈 수술을 받았다"고 말했지만, 병명은 몰랐다. 환자는 통증이 너무 심해 대화가 불가능했다. 의료진이 보호자 동의를 받아서 응급 데이터 서비스에 접속해 9월 중순 황반변성 수술을 받을 사실을 확인했다. 환자는 여기에 맞는 적절한 치료를 받아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개인별 정보 꾸러미를 마련해 놓고도 제대로 쓰지 못한다. 이용자가 12개 응급센터와 169명의 의료진(다른 이는 접속 불가)에 불과하다. 이들은 심평원과 사전 협약을 해서 이용한다. 순천향대 서울병원,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 강릉아산·강원대·원주세브란스병원, 경남의 한마음병원, 전북 동군산병원 등이다. 확산이 더딘 이유는 응급 상황에서 데이터를 조회할 여유가 없고, 사전 협약 등의 절차가 복잡해서다. 캐나다는 응급 상황에서 과거 진료·투약 정보를 공유하는 게 일반화돼 있다.
구급차 환자 중증도 AI가 판단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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