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공무원의 ‘정무 감각’
“정무(政務) 감각이 뛰어나다”는 말은 칭찬일까. 듣는 사람이 정치인이라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헌법이 정치적 중립의 의무를 규정한 공무원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감사원이 지난달 14일 공개한 문재인 정부 시절 ‘신재생에너지 사업 추진 실태’ 감사 보고서에도 정무 감각이 등장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2017년 청와대에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대폭 확대하면 전기요금이 2030년 최대 39.6%까지 오를 수 있다”고 보고했다. 당시 보고를 받은 청와대 관계자는 “정무적인 감각도 없느냐”고 질책했다. 그러자 산업부는 전기료 인상 전망치를 10.9%로 낮췄다.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 방향과 결이 다르니 숫자를 ‘마사지’하라고 주문하는 당당함이 부끄럽다. 청와대 한마디에 전기료 인상률을 39.6%에서 10.9%로 줄여버린 산업부 공무원도 황당하긴 마찬가지다. 이런 게 정무 감각의 찰떡 호흡이라면, 정무 감각에 대한 모독 아닐까.
꼭 문재인 정부 시절만의 얘기는 아니다. 정부 부처 A차관은 대통령실(옛 청와대) 출신이다. 대통령실 주문이라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으로 유명하다. 그는 최근 식사 자리에 ‘윤석열 시계’를 차고 나와 보란 듯 팔을 걷어붙였다. “시계가 눈에 띈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제가 용산 출신 아닙니까”라고 대답했다. 그는 자리 내내 “당정(黨政) 일치. 여당의 총선 승리”를 강조했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언급하자 “차관은 정무직 공무원”이라고 응수했다.
정부 부처 곳곳에 A차관처럼 ‘엇나간’ 정무 감각을 자랑하는 공무원이 있다. A차관만큼은 아니더라도 ‘알아서 기는’ 공무원도 많다. 감사원 보고서에 등장한 산업부 공무원을 꼭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어쩌면 그도 순식간에 숫자를 낮추는 정무 감각을 발휘한 덕분에 가까스로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했을지 모른다.
자발적이든, 비(非)자발적이든 선을 넘는 정무 감각에는 대가가 따른다.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 압박에 밀려 아파트 가격을 낮추거나, 소득 불평등이 개선됐다고 통계를 조작한 공무원은 줄줄이 수사를 받고 있다. 지난 정부에서 남다른 정무 감각을 자랑하며 꽃길만 걷다 윤석열 정부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아 좌천된 공무원도 수두룩하다.
한때 ‘영혼 없는’ 공무원을 두고 아쉽다는 얘기가 많았다. 최근엔 영혼(정무 감각)이 지나쳐 문제다. 공무원이라면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한 번쯤 생각해봤으면 한다. 양심에 반하는 정무 감각을 발휘하며 스스로 일류 공무원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김기환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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