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게손이 '남성혐오'라는 집단착각…위험한 흑마술 부른다 [노정태가 소리내다]
1983년 히틀러의 일기장이 공개됐다. 네오나치는 총통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조사해보니 일관성 없는 문체에 2년밖에 안 된 잉크로 작성돼 있었다. 보통 사람은 ‘그럼 그렇지, 위조품이었어’라며 발길을 돌렸다. 일부 네오나치들은 달랐다. 오히려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총통은 살아계신다! 지금껏 일기를 쓰셨다!”
농담같은 실화다. 그런데 남의 일만도 아니다. 지난달 불거진 ‘집게 손가락 논란’을 떠올려 보자. 스튜디오 뿌리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에 엄지와 검지로 무언가를 집는 듯한 손가락 모양이 담겨 있다. 이것이 한국 남성의 특정 신체 부위가 작다는 걸 의미하는 소위 ‘남성혐오 커뮤니티’ 메갈리아의 상징이며, 누군가 이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었다는 의혹이 남초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
「 집게손 논란 영상 남성이 만들어
확실한 증거 없이 마녀사냥 몰이
팩트 부정하는 음모론 경계해야
」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애니메이션의 콘티는 40대 남성의 외주 작업으로 만들어졌다. 해당 작품의 감독 역시 남성이다. 일개 작업 참여자가 ‘은밀한 사상’을 주입하기 위해 특정한 그림과 기호를 넣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메갈리아 행위의 자백’으로 취급했던, 스튜디오 뿌리 대표 명의의 입장문이 있다. 사과 내용이 담긴 것으로 인터넷에 잠시 올라왔다 삭제됐다. 이것 역시 “총 매출의 80%를 쥐고 있는 원청사에게 ‘납작 엎드리는’ 모습을 보여야 했고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서 냈다”고 한다.
하지만 집게 손가락 논란을 불러일으킨 인터넷의 익명 여론은 수긍하고 있지 못한 듯하다. 업체의 해명 이야기는 쏙 빼놓은 채, 자신들이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여러 ‘의혹’을 들이밀면서 ‘이상한 게 많은데 이게 우연일 수가 있느냐’고 항변한다.
음모론에 휘말려 현실을 부정하는 사례는 드물지 않다. 가령 1980년 5월의 광주에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5.18 음모론’은 어떤가. 음모론의 주장자들이 북한 간첩 ‘광수1호’라 지목한 시민 본인이 신원을 밝혔음에도 음모론자들은 굴하지 않았다. 보수 우파만의 문제도 아니다. 자칭 진보 좌파도 마찬가지다. 2008년 촛불시위의 주제였던 광우병 음모론,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음모론, 세월호 참사를 두고 등장했던 허황된 음모론을 떠올려 보자. 그런 주장을 하며 재미를 본 사람들은 허위 정보 유포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문제의 애니메이션이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의혹’을 제기한 다른 장면도 정상적인 과정으로 만들어진 상식적인 결과물로 봐야 한다. 물론 0.000001%의 확률이라는 것이 있으니 내가 전적으로 장담할 수야 없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남성혐오 세력이 존재하며 그 구성원이 집게 손가락을 심는 게 사실이라면 이를 입증할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물론 제대로 된 증거는 제시된 바 없다. 어떤 이들이 재미 삼아 던졌으리라 추정되는 주장을 남초 커뮤니티의 다수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몇몇 국회의원까지 그러한 여론에 편승하면서 부풀어 오른 헛소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집게 손가락을 ‘남성혐오’로, 더 나아가 ‘모든 혐오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비약이며 논점 일탈이다. 문제의 본질은 집단 착각(Collective Illusions)이다. 필자가 번역한 미국 하버드대 교육대학원 교수인 토드 로즈의 책 『집단 착각』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집단 착각이란 한 마디로 사회적 거짓말이다. 어떤 집단의 구성원 중 다수가 특정한 의견을 거부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런 판단을 내리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이 거부하고 있을 것이라고 넘겨짚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가 바로 집단 착각이다.”
실제로 인터넷에서 적극적으로 댓글을 달고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 이들은 전체 인구 중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2018년 발표된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의 ‘인터넷 뉴스·토론 게시판의 댓글·게시글 작성자의 인구통계학적 특성’ 보고서에 따르면, 그러한 적극적 이용자는 2017년 5~8월 기준 100명 가운데 8명 정도다. 문제는 이들의 근거 없는 여성혐오 선동과 마녀사냥에 제도권이 동조하는 것이다. 오피니언 리더라는 이들조차 집게 손가락 음모론을 방조하거나 심지어 적극적으로 편승하는 모습을 보인다. 토드 로즈가 경고하고 있다시피 이는 정말 위험한 현상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다들 원한다고 착각하는 답을 따르기만 할 경우, 결국 모든 이가 아무도 원치 않는 방향으로 향할 수도 있다. 집단 착각이 만들어내는 흑마술인 셈이다.”
메갈리아 집게 손가락 음모론자들은 세상 어디에나 흔히 있는 손 모양을 두고, 존재하지도 않는 혐오세력이 있다고 울부짖으면서, 자신들이 즐기는 게임 업계에 예상치 못한 타격을 주고 있다. 집게 손 타령을 하는 사람들 스스로야말로 남자들의 즐거움을 빼앗고 남성의 가치와 명예를 떨어뜨리며 소외시키는 남성 혐오 세력 아닐까. 이성을 향한 것이건 자신을 향한 것이건, 혐오를 멈추길 바랄 뿐이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
※〈소리내다〉는 다양한 의견을 담아내는 소통 공간입니다. 위 글은 중앙일보 12월 6일자 26면에 게재된 박가분 작가의 ‘집게손 논란이 페미니즘 검증이라고…본질은 혐오밈 의혹이다’에 대한 반론입니다.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말소리 시끄러워" 이웃여성의 귀 잘랐다…일본 70대 엽기행각 | 중앙일보
- “혼자 죽으면 얼마나 듭니까?” 70대 싱글남의 ‘고독사 예약’ | 중앙일보
- 암투병 중인 장모 몸에 불 붙였다…사위의 충격적 퇴마의식 | 중앙일보
- "엄마들 모임은 동물의 왕국" 정신과 의사가 본 '서열 비밀' | 중앙일보
- 면역력 떨어진 사람 90% 이상 감염…코로나 지나자 급증한 병 | 중앙일보
- 드레스 은밀한 부분 더듬는 손…세상에서 가장 슬픈 패션쇼 | 중앙일보
- '이승만 기념관 기부' 이영애, 한미동맹재단에도 5000만원 쾌척 | 중앙일보
- "그녀라면 OK"…이효리, 창사 39년 풀무원 첫 연예인 모델 됐다 | 중앙일보
- "우리 옷 사지마" 충격 광고…직원 만족도 91%, 이 회사 비결 [브랜드로 본 세계] | 중앙일보
- 배우 권해효, 통일부 조사 받는다…"조총련 인사 무단접촉"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