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인 러시아로 여행을? 일단 제 얘기 들어보세요

오영식 2023. 12. 12. 19: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들 손잡고 세계여행] 러시아를 지나 드디어 라트비아로

2022년 9월 30일부터 2023년 4월 14일까지 9살 아들과 한국 자동차로 러시아 동쪽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서쪽인 포르투갈 호카곶을 지나 그리스 아테네까지 약 4만 km를 자동차로 여행한(3대륙, 40개국, 100개 도시) 이야기를 씁니다. <기자말>

[오영식 기자]

- 지난 기사 '러시아까지 가서 키즈카페부터 찾은 사연'에서 이어집니다. 

우리 부자가 한국에서 자동차를 가지고 러시아로 간다고 했을 때, 얘길 들은 많은 지인이 걱정하며 말했다.

"아니, 러시아는 지금 전쟁 중 아니야? 거길 애랑 간다고? 미쳤어?"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설득했다.

"전쟁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하고 있고, 러시아는 땅이 워낙 커서 저희가 지나가는 곳과 전쟁이 벌어지는 곳의 거리가 1,000km 정도 떨어져 있어요. 최대한 안전하게 다녀올게요."

지금도 언론에서는 '러시아 전쟁' 얘기가 수시로 나오니 러시아라는 나라는 한창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과 우리가 지나가는 도로까지의 거리는 북한 신의주에서 대한민국 부산까지의 거리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아들과 함께 하는 러시아 여행

하지만, 어린 아들과 함께하는 여행이니 그래도 최대한 조심조심하며 운전하길 한 달여 만에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여행지가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과 아무리 거리가 멀다 해도 사실 우리나라와 친숙하지 않은, 과거 공산권 국가의 수도이기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한 가지 걱정되는 문제가 있었다. 금융 제제로 러시아에서는 은행 입출금이나 ATM 사용이 불가능했기에 나는 한국에서 출발할 때 달러와 현금을 찾아서 차에 보관한 채 여행했다. 그런데 러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물가가 훨씬 비싸서 출국 때까지 쓸 돈이 아주 빠듯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혹시 예상치 못한 경비가 들면 어쩌지?' 하고 조마조마해하며 모스크바 시내로 들어왔다.

인구가 1300만 명이나 되는 모스크바는 한 달간 지나오며 그동안 본 다른 도시의 모습과는 다르게 보였다. 시베리아의 도시와는 달리 길도 널찍널찍했고, 건물도 모두 화려했다. 그리고 비가 조금만 내려도 인도와 차도가 모두 진흙투성이가 됐던 그간 도시들을 비웃듯 거리도 아주 깔끔했다. 거기에 며칠 후 국가 기념일 준비 때문인 듯 거리 곳곳엔 경찰들이 검문과 경비를 하고 있어 긴장하며 숙소로 향했다.

저녁엔 우리 부자의 유튜브 구독자분이 연락을 해와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한국식당에 같이 가서 순댓국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그 구독자분은 우리에게 귀한 러시아 현금을 빌려줘서 한국 계좌로 이체해 드렸다.

"태풍아, 우리 러시아 돈이 얼마 없었는데 이 삼촌이 우리한테 빌려주셨어. 고맙다. 그렇지?"
"와~ 다행이다. 아빠, 그럼 나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평소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아들이 요 며칠 눈치가 보였는지 간식도 자제 중이었는데, 오랜만에 눈치 보지 않고 먹으며 좋아했다.

고생 끝, 행복 시작인 곳에 다다르다
 
▲ 모스크바 굼 백화점 아주 화려한 백화점
ⓒ 오영식
 
다음날 우리는 제일 먼저 러시아 대통령이 있는 크렘린궁과 붉은 광장으로 갔다.
지금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만km를 운전해 모스크바 성 바실리 성당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고생 끝, 행복 시작'과도 같은 곳이다. 시베리아의 척박한 곳을 지나 이제는 제대로 된 도시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부자도 다른 횡단자들처럼 감회에 젖어 성당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모스크바 성 바실리 성당 유라시아 횡단자들에게는 감회가 새로운 곳
ⓒ 오영식
 
모스크바에서 가까운 러시아 국경은 핀란드와 에스토니아 그리고 라트비아, 3개 나라와 접해있다. 원래 우리의 계획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관광하고 핀란드 쪽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징집령 발령 등 상황에 따라 3개 나라 국경 심사대의 교통상황이 수시로 급변했다. 자칫 탈출 행렬이 몰리는 국경으로 가거나 운이 나쁘면 국경 심사대 앞에 줄을 서서 하루 이상을 기다려야 할 수도 있었다.

나는 어린 아들에게 힘들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인터넷과 각종 뉴스를 분석하며 당시 상황이 가장 좋아 보였던 라트비아로 향했다. 모스크바에서 라트비아 국경까지는 600km 정도 떨어져 있어 국경 바로 전에 있는 작은 도시 벨리키예루키에 들러서 하룻밤 자며 휴식을 취하고 비상식량을 준비했다.

다음 날 우리는 아침 일찍 라트비아 국경으로 향했다. 국경에 다 와 갔지만 예상한 대로 차량 대기 행렬은 보이지 않았다. 국경 3km 정도를 남기곤 2차선에 트럭들이 줄지어 있었다. 2차선은 트럭 대기 줄이고 승용차는 1차선으로 가면 된다는 정보를 알았던 나는 계속해서 1차선으로 달렸다. 도착하니 승용차 대기 줄에는 우리 앞에 승용차 단 3대만 기다리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청년과의 짧고 강렬한 대화
 
▲ 러시아-라트비아 국경검문소 국경의 차량대기 상황은 수시로 변했다
ⓒ 오영식
 
한 시간 정도 기다리다 신호에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요금소같이 생긴 곳에서 여러 차량이 검문검색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앞뒤에 대기 중이던 차량의 번호판엔 국가식별 영문으로 'UA'가 쓰여 있어 운전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혹시 어디에서 오셨나요?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우크라이나 사람이에요."

"안 그래도 우크라이나 차량번호판 같아서 물어봤어요. 그런데 지금 러시아와 전쟁 중인데 우크라이나 차량이 러시아에서 돌아다녀도 괜찮나요?"
"네, 괜찮아요. 그런데 오늘 가족과 러시아에서 나가려는데 여기서는 잘 모르겠네요."

"아! 그렇군요. 안전히 잘 가시길 바랍니다. 힘내세요."
"감사합니다. 러시아는 길이 안 좋아요. 오늘 나가시면 다른 나라는 다 길이 좋을 거예요."

우크라이나 청년과 짧게 대화하고는 차에서 기다렸다. 가만히 보니 차량 서류를 갖고 러시아 국경심사 직원에게 주면 한참 후 다른 몇 명의 직원이 나와서 차량의 모든 문을 다 개방하고 내부의 모든 짐을 일일이 열어서 확인하는 것 같았다.

우리도 눈치껏 차량의 모든 짐을 다 꺼내놓았다. 그러고는 차량 서류와 함께 모든 짐을 열어서 검사 받았다. 그렇게 4시간 만에 차량 서류를 받고 무사히 국경을 빠져나왔다.
  
▲ 러시아 국경심사 차량의 모든 짐을 꺼내 놓고 검사 받는다
ⓒ 오영식
 
러시아 국경을 나와 300m쯤 운전하니 바로 라트비아 검문소가 나왔다. 차량 서류를 들고 사무실로 갖다주려는데 라트비아 검문소 직원이 우리 차량 쪽으로 다가왔다.

"여권, 차량 서류, 비자 주세요."
"네, 여기 있습니다."

그 직원은 서류를 받고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러시아를 여행하며 항상 공무원에게 먼저 찾아가서 물어봐야 알려주는 상황에 익숙해져서인지, 가만히 있어도 먼저 찾아와 해결해 주는 공무원의 작은 친절이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다.
 
▲ 라트비아-러시아 국경검문소 라트비아 공무원은 아주 친절하다
ⓒ 오영식
 
그런데 조금 전에 내 서류를 갖고 갔던 여직원이 다시 나와서 물었다.

"비자도 주세요. 비자는 없나요?"

사실 처음에 비자를 달라고 할 때 말할까 망설였었기 때문에 비자를 달라고 말할 걸 예상했던 나는 바로 쓸데없는 말까지 붙여가며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저는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대한민국 사람은 대부분 국가에서 비자가 필요 없습니다.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괜스레 뿌듯한 마음을 느끼며 대답하자 그 직원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잠시 뒤 바로 서류를 되돌려 받았다. 바로 옆에 있던 보험사에서 차량 보험에 가입한 후 국경을 빠져나왔다. 아들과 만세를 불렀다.

"태풍아, 우리 이제 러시아 완전히 빠져나왔다. 이제 라트비아야."
"어? 진짜? 이제 러시아 아니야?"

"어, 이제 아빠 카드도 쓸 수 있고, 예약이나 이런 것도 다 한국에서처럼 이용할 수 있어. 아휴~ 아빠, 너무 기분 좋다~"
"진짜야? 아빠, 그러면 우리 오늘 치킨 먹자~"

"그럴까? 치킨 먹고 파티하자."
"파티? 와~ 좋아~ 예쓰으~"

러시아는 은행뿐만 아니라 숙박 예약, 지도 그리고 각종 국제기업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사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간단한 인터넷 예약이 아무것도 되지 않아 여간 고생한 게 아니었는데 이제 라트비아에서부터는 모든 게 해결돼 마치 한국에 입국한 것처럼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마음이 조금 여유로워지자, 나는 그동안 여행하기에 조금 불편했을 뿐 러시아에도 감사함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지금의 나'를 만든 문장이 하나 있다. 30여 년 전, 당시 10대 소년이던 나의 심금을 울린 문장은 바로 TV <동물의 왕국>에서 나온 성우의 내레이션이었다. 사바나 초원 위로 붉게 물든 하늘을 보여주며 성우가 이렇게 내레이션을 했다.
 
▲ 시베리아의 석양 유라시아 횡단을 하면 매일 이런 석양을 볼 수 있다
ⓒ 오영식
 
"과연 인간이 쓴 100권의 소설책이, 한 차례의 석양이 가져다주는 감동을 능가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장이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당시 나는 어린 나이에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 달간 서쪽 하늘을 바라보며 여행한 우리 부자는 3000권의 소설책보다 값진 석양을 선물로 받았다. 그런 러시아에도 감사의 인사를 했다.

"러시아, 볼쇼이 스파시바(러시아여, 대단히 감사합니다)!"

-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여행 기간 내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새로 작성하였으나, 사건 등 일부 내용은 기자의 저서 <돼지 아빠와 원숭이 아들의 흰둥이랑 지구 한 바퀴>에 수록되어 있음을 밝힙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