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폭력·고독사·노화…문제를 품은 그 영화들
편집자주 - 그 자체로 책 전체 내용을 함축하는 문장이 있는가 하면, 단숨에 독자의 마음에 가닿아 책과의 접점을 만드는 문장이 있습니다. 책에서 그런 유의미한 문장을 발췌해 소개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기획하고 ‘씨네21’의 이다혜, 이주현 기자가 힘을 보탠 인권영화 프로젝트 기록이다. 열 편의 영화를 통해 우리 시대 인권 현주소를 살핀다. 이옥섭 감독의 영화 '메기'를 소재로 데이트폭력과 정보인권, 청년실업 문제를 다룬다. 최익환 감독의 영화 '우리는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를 통해서는 ‘자유’라는 보편적 권리 앞의 청소년 인권을 살핀다. 남궁선 감독의 영화 '힘을 낼 시간'으로는 청(소)년의 꿈과 좌절을 비추고, 신아가·이상철 감독의 영화 '봉구는 배달 중'을 통해서는 노인과 아동 차별에 초점을 맞춘다. 이 외에 5편의 영화를 통해 스포츠와 청소년 인권, 존엄하게 죽을 권리, 비정규직과 무연고고독사, 병역거부, 가난과 장애, 감시사회 속 개인의 불안을 분석한다.
인권에 대한 논의에서 소수자를 중심에 두어야 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리라. 세상은 언제나 다수를 위해서 신념을 쉽게 바꾸곤 한다.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린 것이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우습게도, 경진 역시 그런 일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세상의 오해로 억울한 일을 당한 어린 시절의 기억이. 그리고 그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내가 개를 고양이라 우겨도 믿을 사람은 믿고 떠들 사람은 떠든다.” 그렇기 때문에 다수에 속하기 위해 발버둥 쳐야 하는 세상. 내가 이해받지 못했기 때문에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세상. - p.21
최익환 감독 역시 다음 작품의 취재 차 모 고등학교의 기숙사를 방문한 경험을 들려줬다. 그 기숙사는 학생들이 방에 들어가고 나갈 때 출입카드를 꽂는다고 했다. 학생들의 출입 시간이 모두 기록되는 것이다. “곳곳에 성능 좋은 CCTV도 설치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감시 체제 하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학생과 학부모의 동의로 운영되고 있지만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부모들이 원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학업 성적을 위해 한마음으로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에서 가장 힘든 개혁은 부동산 개혁과 교육개혁이 아닐까”라고 말했다. 어쩌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학교에서의 지나친 통제와 감시를 허용하게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학교를 경쟁의 장으로 만들게 되었을까. 어쩌다 학교는 이토록 살벌한 공간이 되었을까. - p.49
〈힘을 낼 시간〉은 이른 나이부터 너무 힘을 내고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궁선 감독은 제목이 막무가내의, 무성의한 응원 메시지처럼 들리지 않았으면 했다. “취재한 친구들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괴로웠던 순간이 많았어요. 그런 책임감을 굉장히 강하게 느꼈던 어떤 날이 있 었어요. 주인공 세 사람에게 내레이션을 다 시킨 다음 저 자신에게 한 말이, ‘어쩌다가 이 짐을 지게 됐지만 내가 힘을 낼 시간이다’였어요. 아이돌도 그렇고 영화라는 일도 그렇고, 재능 으로 하는 일이니까 네가 뛰어나면 될 거라고 사람들은 가볍게 생각해요. 어떤 것도 그렇지는 않을뿐더러, 아이돌 같은 경우는 보이지 않는 데에서 엄청나게 노력을 해서 완성된 채로 사람들 앞에 서야 하니까 압박감이 더하죠. 누구나, 아이돌 출신이 아니라고 해도, 과도하게 자기를 몰아붙이는 게 당연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갖는 피로감을 공유한다고 생각해요. 궤도에서 이탈한 사람들에게 손을 적절한 때 내밀었나? 하는 죄책감을 다 같이 느낄 수밖에 없어요.”
〈힘을 낼 시간〉 은 그렇게 뒤에 남은 사람들에게 손을 내미는 영화다. ‘다음’을 생각할 수 있는 에너지를 모두가 발견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 p.75~76
“노년이 된다는 건 늘 외면하고 싶은 문제였던 것 같다.” 신아가 감독은 노화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들려줬다. “반지하 작업실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공부하던 어느 새벽이었다. 그야 말로 문득 ‘70대의 신아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는 나도 정말 늙겠지? 그때도 나를 둘러싼 상황이 지금과 같다면 어떨까? ‘그렇게 노인이 된다’는 걸 직시하니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다. 어쩐지 이 이야기를 더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화를 외면하고 싶은 마음, 노화에 대한 두려움. 어쩌면 이것이 노인문제를 대할 때의 우리의 본능적이고 본질적인 마음인지도 모른다고 신아가 감독은 말했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신체 기능이 저하된다. 시력이 떨어지고 걸음이 느려지고 호르몬에도 변화가 생긴다. 질병에도 쉽게 노출되며 육체적 건강은 정신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지만, 언젠가 세월의 변화와 그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순간이 오고야 만다는 사실은 우리를 두렵게 만든다. 육체적 쇠퇴와 함께 사회적으로 도태된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 p.85~86
〈4등〉 은 이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을 영화 속에 펼쳐낸다. 그러면서도 광수 역시 과거 체벌의 피해를 입었음을 알림으로서 ‘폭력이 폭력을 낳는’ 문제를 드러낸다. 그런데 인물 설정이 다소 특이하다. 영화평론가 듀나는 비평문에서 광수를 이렇게 설명했다. “체벌 금지라는 원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가장 폭력성을 유발하는 인물을 고른 것이다. 이는 시작부터 영화에 엄청난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다른 하나는 그 과정이 성인 광수라는 입체적인 인물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는 위에서 말한 두 개의 카테고리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 없이 흐름에 휩쓸린 인물이 아니다. 그릇되고 어리석지만 주체적인 길을 걷는 인물이다. 그가 제자들에게 가하는 폭력은 한심했던 젊은 시절 자신에게 가하는 상징적인 처벌로, 이는 탐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복잡한 행동이다.” 광수라는 캐릭터는 〈4등〉을 복합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는 좋은 코치인가? 우리는 광수라는 인물을 어디까지 이해하고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 p.111~112
치매라는 병에 대한 접근도 비슷하다. 오멸 감독의 할머니 역시 돌아가시기 전 치매를 앓았다고 한다. 나이 들면 훈장처럼 얻게 되는 얼굴의 주름처럼 퇴행성 뇌질환인 치매 역시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고 감독은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치매가 주변 사람들을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병이라고 인식하지만,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보면 원초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할 수 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당혹스러울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받아들이는 사람의 문제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어릴 때 대소변을 가리지 못했다. 부모가 그런 우리를 돌봐주었다. 그걸 어른이 된 자식이 되갚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떤가.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 p.130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에는 가난에 대한 공포가 섞여 있다. 〈소주와 아이스크림〉에서 그리는 고독사의 모습 역시 가난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세아에게 모아둔 소주병을 주며 아이스크림을 사다 달라고 부탁한 여자의 속사정을 영화가 담아낼 때, 우리는 여자가 딸에게 전화해 돈을 빌려달라고 읍소하고, 밀린 방세 때문에 방을 비우라는 집주인의 통보에 무력하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돕기는커녕 여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사람 하나 찾기가 어렵다. 아마도 여자는 세아와 마주치기 전 혼자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을 것이다. 유령처럼. 아니, 영화를 끝까지 보면 애초에 세아가 본 사람은 누구였을까 싶다. 고독사한 여자의 유령이 세아를 찾아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자의 사정이 낱낱이 드러날 때 우리는 여자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힌 가난을 목격한다. - p.151
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르고 | 이다혜·이주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28쪽 | 1만68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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