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태인 동원한 '나치 위조지폐 작전', 영국 경제 뒤흔들다
[김성호 기자]
서구 조폐국에선 모르는 이가 없는 사건이 있다. 이름하야 베른하트 작전. 1942년부터 2차대전 종전 때까지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위폐제조 작전이다. 강제수용소에 수감돼 있던 유태인 포로들의 손을 빌려 무려 1억 3100만 파운드를 찍어낸 희대의 사건이다. 전후 영국의 경제를 몹시 곤란하게 했을 만큼 큰 파급이 있었던 이 사건을 오늘 씨네만세에서 다루려 한다.
1억 3100만 파운드는 당시 영국 외환보유고의 4배에 달하는 거금이다. 위폐로 이만한 돈을 만들어 유통했으니 전쟁으로 물가가 폭등했던 영국 경제가 휘청일 밖에 없었다. 호사가들은 이를 두고 독일이 영국을 향해 발사한 수많은 로켓보다도 실질적 타격을 입힌 전술이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북한을 비롯하여 적잖은 나라가 달러와 유로 등의 위조와 자주 얽히는 것도 베른하트 작전의 연장선에 있다 하겠다.
▲ 카운터페이터 포스터 |
ⓒ 미디어 소프트 |
나치 독일의 위조지폐 작전, 영화로 태어나다
베른하트 작전은 전쟁 직후 세상에 알려진다. 베른하트 작전을 직접 수행한 아돌프 브루거가 독일 패망 뒤인 1945년 체코 프라하로 도피한 뒤 경찰에 사건을 알렸던 것이다. 영국 파운드화는 국경을 넘어 전 유럽에서 거래되고 있었기에 체코 또한 피해가 없지 않았다. 은행 당국이 진짜 화폐라 믿고 있던 지폐 수천장을 가져온 가운데, 브루거는 그중 위폐를 200여 장이나 잡아냈다고 전한다.
솜씨 좋은 유태인 포로를 강제수용소에 격리해 위폐를 만드는 일에 썼다니, 영화계가 이를 가만히 두었을 리 없다. 브루거가 전후 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 < The Devil's Workshop >의 판권을 산 독일 영화 제작자가 2008년 작품을 영화화하니 <카운터페이터>가 바로 그 영화가 되겠다. 나치에 포로로 붙잡힌 뒤 위폐작업을 주도하는 살로몬 소로비치(카알 마르코빅스 분)와 그 동료들의 이야기이다.
1940년대 소로비치는 독일 내에 악명이 자자한 수배범이다. 러시아에서 미술을 전공했으나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그가 위조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재능을 발휘한다. 그가 만드는 위조여권은 검거되는 경우가 많이 없어 국경을 넘는 일이 갈급한 이들이 끊이지를 않는다. 어느 날인가, 한 매력적인 여성이 소로비치를 찾는다. 그녀에게 아르헨티나 여권을 만들어주기로 한 소로비치, 그리고 둘은 함께 밤을 지새운다.
다음날 소로비치의 숙소를 부수고 들어온 이들이 있다. 다름 아닌 독일 군인경찰이다. 헤어조크(데비드 스트리에소브 분)라 불리는 장교는 '위조의 제왕'을 붙잡았다며 한껏 기뻐한다. 그로부터 소로비치는 나치 수용소에 수감된다. 온갖 험한 작업을 하다 쓰임이 사라지면 총알 한 발에 죽어나가는 험난한 시간이 지나간다.
▲ 카운터페이터 스틸컷 |
ⓒ 미디어 소프트 |
그러나 어디든 재주 있는 자는 쓸모를 찾는 법이다. 그림에 일가견이 있는 그는 이내 독일군의 눈에 든다. 장교의 초상부터 수용소 벽면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는 일까지 소로비치의 몫으로 떨어진다. 꿀꿀이죽보다 못한 것을 먹는 다른 재소자에 비한다면 그래도 빵이며 소시지 조각을 얻을 수 있는 소로비치의 상황이 나쁘지가 않다.
그러던 어느 날, 상황이 뒤바뀐다. 소로비치에게 새로운 수용소로 이감명령이 떨어지고 그는 기차에 실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옮겨가게 된다. 그곳 책임자는 다름 아닌 헤어조크다. 소로비치를 잡아넣은 그가 다시금 그 운명을 손아귀에 쥐게 된다. 헤어조크는 소로비치에게 어느 작업공간을 소개한다. 그곳이 바로 베른하트 작전을 수행하는 팀이다. 독일 뒷골목에서 위조의 제왕으로 불린 소로비치가 수용소에서도 위폐 제조를 책임지게 된다.
처음은 파운드, 나중은 달러화를 위조하는 작업이다. 여권을 위조하던 시절부터 위조달러 제작에 관심을 보였던 소로비치가 아닌가. 위조지폐를 만드는 조건으로 다른 재소자들과는 전혀 다른 비교적 편안한 삶까지 보장되니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실 하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이지만.
그가 속한 사동엔 전직 인쇄 기술자부터 은행 직원 출신들로 가득하다. 이들이 나치 독일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위폐 제작부터 각종 공문서를 위조하는 작업에 매진한다. 쓸모가 없어지면 그저 총알 한 발에 목숨을 잃고 마는 포로 신세다. 헤어조크 취향대로 탱고 선율이 흐르는 우아하고 청결한 작업장에서 다른 사동으로의 이감이며 죽음을 피하기 위한 필사의 위폐 제작이 시작된다.
▲ 카운터페이터 스틸컷 |
ⓒ 미디어 소프트 |
물론 위폐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파운드화의 원단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것부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거기 쓰인 잉크도 똑같이 구해야 하고, 각종 표기며 상징 또한 그대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고도 전문가의 시선으론 한눈에 차이를 알아볼 수도 있는 일이다. 집중해 바라봐도 도저히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정교한 위폐를 만드는 작업은 하나부터 열까지가 죄다 난항이다.
모두가 소로비치와 뜻을 같이 하는 것도 아니다. 평생 올곧게 살아왔다 자신하는 어느 수감자는 범법을 일삼았던 소로비치와 제가 완전히 구분된다고 주장한다. 저는 오로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붙잡혀 억지로 일을 하는 것이지만, 소로비치는 태생이 틀려먹어서 뻔뻔하게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원작 논픽션을 저술하기도 한 실제인물 브루거(오거스트 딜 분) 또한 문제다. 아내와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서도 크고 작은 저항을 지속했다는 그다. 파운드며 달러를 위조하는 작업은 그대로 독일의 전비가 되고, 이로부터 전쟁이 독일에 유리하게 흘러갈 것을 그는 우려한다. 살기 위해 위폐를 만들어야 한다지만 그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게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위폐를 만드는 공정에서 일하면서도 남몰래 위폐 제조를 방해하는 그 때문에 위폐 제조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다.
나치 친위대는 위폐 제조를 압박하고, 브루거는 몰래 일을 망치기를 거듭한다. 그 사이에서 주어진 시간 내에 위폐를 만들어내지 못하면 작업자 여럿을 죽이겠다는 명령까지 떨어진다. 상황은 갈수록 급박해지고, 사동 내의 갈등 또한 심각해져 간다.
▲ 카운터페이터 스틸컷 |
ⓒ 미디어 소프트 |
영화는 그저 살아남기 위하여 위폐를 제조하려는 소로비치와 그런 그를 막아서는 이, 또 제가 살고자 막아서는 이를 증오하는 이들의 모습을 숨막히는 긴장 가운데 잡아낸다.
결핵약 하나 구할 수 없는 곤란 속에서 죽어가는 어린 수감자의 모습, 또 약을 구하기 위해 위조달러 개발을 반드시 해내겠다 약속하는 소로비치, 그마저 막아내려는 브루거의 모습에서 선과 악을 쉬이 재단할 수 없는 삶의 복잡다단한 면모가 드러난다.
<카운터페이터>는 한국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독일영화다. 유대계 자본을 받은 할리우드 대작에서만 간간이 마주할 수 있었던 홀로코스트를 가해 당사국이기도 한 독일 영화계가 직접 다루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수용소 내 위폐 제작이라는 흔히 생각하기 어려운 설정이 관객의 흥미를 잡아끌고, 생명의 위기 앞에 윤리적으로 거듭 갈등하도록 하는 상황이 긴장을 더한다.
영화는 지난 2008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최고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미국 평단마저 인정한 이 작품은 내게도 홀로코스트를 다룬 작품 가운데 으뜸가는 감상을 안겼다. 이런 영화를 보지 않고 산다는 건 그만큼 삶이 얄팍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보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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