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정식의 삶의 향기] 덕수궁 돌담길의 흰 비둘기
겨울을 재촉하는 찬비가 내린 다음 날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보았다. 이 길을 천천히 걷다 보면 역사 속 장면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그날은 길바닥에 늘어 붙은 젖은 낙엽을 보면서 구한말 개화기에서 해방 전후까지의 장면이 상상 속에 펼쳐지면서 한양→한성→경성→서울의 시간이 차례대로 다가왔다.
두루마기를 입은 노인장이 청요리를 먹고 팔자걸음을 걷던 모습, 뽀얀 분을 바르고 양산으로 얼굴을 가렸던 ‘모던걸’들, 헉헉거리며 달렸던 인력거꾼의 하얀 입김이 보인다. 또 콧수염을 기른 백계 러시아인의 손풍금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일본인의 ‘게다’ 소리까지 들린다. 그리고 볼에 구두약을 묻힌 ‘슈샤인보이’의 천진한 미소가 등장하더니 필터 없는 담배를 피우는 미군들의 담배 연기도 맡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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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전 조선을 포위한 열강들
파란의 한국 근현대사 떠올려
평화 메시지는 언제 날아올까
」
근세사의 격랑이 휘몰아쳤던 이 길 곳곳에 스며있는 역사의 편린을 하나씩 쪼듯 비둘기들이 바닥을 향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이곳의 비둘기는 나는 시간보다 걷는 시간이 많아도 행인들과 길 다툼을 벌이지 않는다. 행인들도 비둘기를 조심해가며 걷는다. 그날은 평화의 상징인 흰 비둘기도 눈에 띄었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다. 성경 창세기 편에 따르면 온 세상이 물에 잠겼을 때 비둘기가 방주(方舟)에 있던 사람들에게 올리브 잎사귀를 물어다 주자 비에 젖지 않은 올리브 잎사귀를 본 사람들이 비로소 지상의 물이 다 빠진 것을 알았다. 이 공로로 비둘기는 올리브 잎사귀와 한 세트가 되어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뛰어난 귀소본능으로 통신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통신에 이용되는 비둘기를 전서구(傳書鳩)라고 한다. 전서구가 되려면 다리에 출발 시각을 적은 끈을 묶은 채 임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훈련을 반복적으로 받아야 한다. 칭기즈칸도 전서구를 통해 승전보를 전했다. 1848년 프랑스 인권혁명도 전서구를 통해 전 유럽으로 퍼져나가 인권을 신장시키는 데 비둘기가 한몫했다.
전서구는 통신사와도 인연이 깊다. 유대인 사업가 로이터가 벨기에 브뤼셀과 독일 아헨 구간 사이에 전신선이 깔려있지 않은 문제점을 1850년에 전서구를 통해 해결했다. 그 결과 브뤼셀의 주식 정보를 기차보다 5시간이나 빠른 2시간 만에 아헨에 전달할 수 있었는데 이것이 로이터통신이 성공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비둘기의 생태를 자세히 알고자 지리산 기슭에서 새와 함께 산다는 조병철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조 선생은 비둘기를 키우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둘기는 보통 알 두 개를 낳는데 암수가 교대로 20일 정도 알을 품지요. 그 알들이 부화 돼 다 자라 짝을 찾으면 부부가 일부일처로 살아갑니다. 비둘기요? 순하고 헌신적이지요.” 조 선생은 인간계에선 비둘기와 같은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비둘기는 고려시대 때 최씨 무신정권을 탄생시키는 데도 촉매 역할을 했다. 정중부에서 시작된 무신정권은 경대승을 거치면서 이의민이 최종 승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의민의 아들 이지영이 무신 최충수가 애지중지하던 전서구를 빼앗자 최충수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형 최충헌과 함께 이의민과 이지영을 살해해 4대에 걸친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다. 이 무신정권은 삼별초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62년이나 유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비둘기는 애완조로도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자랑삼아 비둘기장을 들고 장터에 외출하는 사람까지 생겼다. 서양에선 평화의 상징으로, 동양에선 애완조로 대접받던 비둘기가 현대도시에선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다. 산성이 강한 비둘기 배설물이 도시 건축물과 동상을 부식시키고 병균을 옮긴다는 이유에서다. 심지어 비둘기를 ‘나는 쥐(flying rat)’라고 하면서 유해 조류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래도 ‘비둘기파’를 온건파로 부르는 걸 보면 비둘기에겐 평화의 이미지가 아직도 유효한 듯싶다.
그날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보았던 흰 비둘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다른 비둘기들은 고개를 앞쪽으로 끄덕이는데 그 비둘기만은 젖은 낙엽 위에서 끊임없이 뒤를 돌아다봐서다. 비둘기의 이 모습은 고난으로 점철된 우리 근대사를 한 번쯤 뒤돌아보라는 뜻이 아닌지. 불과 1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힘의 공백을 감지한 열강들은 물고랑을 타고 차오르는 밀물처럼 삽시간에 조선의 목까지 차오르다 이내 머리까지 삼켜버렸다.
최근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터지고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도 어지럽다. 젖은 낙엽 위를 걷던 흰 비둘기를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는 말에 한 친구가 이렇게 대꾸한다. “비둘기 한 마리 가지고 너무 예민한 거 아냐?”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강에 둘러싸여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 상태로 70년이 지나는 한반도에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올 흰 비둘기를 기다려 본다.
곽정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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