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의 마켓 나우] 지원하되 간섭 않아야 K과학기술 나온다
정부가 과학기술 지원 정책을 펴다 보면 ‘프리 사이즈(one size fits all)’의 덫에 빠지기 쉽다. 획일성을 피해야 경제를 한 차원 더 높이는 효율적이고 창조적인 과학기술이 탄생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뀌면 녹색혁명·창조경제·4차산업혁명·인공지능 등 새로운 유행어에 맞춰 과학기술정책을 재편하겠다는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true believers)’이 나타난다. ‘어릴 때부터 코딩을 가르쳐야 한다’, ‘모든 학생이 인공지능 과목을 들어야 한다’는 등 세상을 단색으로 물들이려는 확고한 신념이 한편 부럽지만, 자기오류검증 시스템이 없는 사고체계가 안타깝기도 하다.
이번 정부에서는 ‘연구 카르텔 타파와 효율화’가 슬로건으로 대두했다. 연좌제마냥 모든 연구자가 단체기합을 받고 있다. 글로벌 연구를 하고, 연구비를 적게 쓰기만 하면 효율적이라는 것도 비전문가의 논리가 아닌지 검증이 필요하다.
연구비는 연구자에게 필요한 만큼 지원하면 된다. 문제는 연구자를 선정하고 연구비 규모를 판단하는 사람들의 자격 여부다. 그들이 자타공인으로 전문성과 권위를 인정받지 못하면, ‘카르텔’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다.
벤처업계의 상식에 따르면 성공한 투자전문가와 성공한 사업가는 일치하지 않는다. 과학기술 예산 투자에는 기획 및 투자 경험이 없는 전문연구자들이 너무 많이 관여하고 있고, 일하는 사람들은 재량권이 없다. 문제가 생기면 결국 해결책이라고 나오는 게 위원회의 획일적인 의사결정이다.
경쟁국들의 연구 지원 정책을 살펴보면 우리나라가 따라잡아야 할 격차가 드러난다. 유럽연합(EU)은 초대형 사업을 수립하고 한도 내에서 연구자들이 연구비를 자유롭게 쓸 수 있게 해준다. 미국에서도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같은 경우, 기술전문가가 5~10년씩 장기간 근무하면서 한 분야를 일구어낼 수 있도록 예산자율권을 준다. 한국에 적용하면 한국연구재단의 단장급이 연구비 사용의 전적인 재량권을 가지고 사업규모나 지원체계를 자유롭게 결정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단장들에게 그런 권한을 준다면 아마 난리가 벌어질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누구에게 일단 권한을 주고 그 결정을 따른다는 ‘팔로어십(followership)’ 문화가 없기 때문이다.
존경받고 신뢰받는 과학 리더십 확립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구관리와 기획분야에서 전문성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 신뢰받는 과학정책과 과제기획이 가능하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정책이 세계적인 K문화의 기초를 닦았다. 정부가 과학기술분야에서도 ‘지원하고 지켜본다’는 원칙을 지키면 K과학기술이 융성할 것이다. 전문성 없는 사람들이 자꾸 솥뚜껑을 열면 설익은 밥이 나올 뿐이다.
이병훈 포스텍 반도체공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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