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생태·보행…‘살기 좋은 도시’ 핵심 키 ‘가로수’
폭염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가로수는 도시민이 햇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하고 평등한 공간이다. 나무는 증산과정에서 뿌리에서 끌어올린 수분을 수증기 형태로 방출하면서 주변 기온을 낮춘다. 도심 녹지는 나지보다 평균 3~7도 온도가 낮고, 습도는 9~23% 높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가로수 주변을 걸을 때 쾌적함을 느낀다.
나무를 크게 키우는 도시들
독일 프라이부르크는 이 같은 가로수의 기능을 ‘환경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핵심 오브제로 활용하고 있다. 가로수를 크게 키워 그늘을 최대한 넓게 만드는 것이 가로수 정책의 핵심이다. 그늘을 만드는 이유는 보행과 자전거 이용의 편의를 위해서다. 1970년대까지 극심한 차량 혼잡을 겪었던 프라이부르크가 자전거 교통분담률을 현재의 30% 수준으로 끌어올린 데에는 가로수의 역할이 컸다.
프라이부르크는 가로수 수령을 최소 50년에서 100년으로 우리보다 길게 본다. 가로수마다 식별번호를 달아 정기적으로 관찰하고, 나무의 상태에 맞춰 관리한다. 전정은 나무가 어릴 때 수형을 잡아주는 범위에서 최소한으로 시행한다.
프라이부르크에는 전체 면적 153㎢에 2만3000본의 가로수가 있다. 제주도는 1850㎢에 7만5000본이 식재됐다. 대략 6600㎡와 2만4000㎡당 가로수 한 그루가 있는 셈이다.
독일 비스바덴도 가로수를 통해 도시의 품격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도시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고급 온천 휴양도시로 기능한 비스바덴은, 유럽의 관문 프랑크푸르트역에서 기차로 40분이면 갈 수 있어 당일치기 근교 여행지로 관광객이 많다.
비스바덴 중앙역에서 거리로 나와 처음 마주하는 풍경은 넓은 공원과 가로수다. 광활한 녹지 위 사람들의 여유로운 움직임은 휴양도시의 풍요로운 첫인상을 만들어낸다.
고급 쇼핑가인 빌헬름거리(Wilhelmstraße)는 2열로 식재된 양버즘나무가 긴 터널을 이룬다. 양버즘나무 가로수길은 비스바덴을 대표하는 명소가 됐다. 보도는 밤머댐공원과 수평으로 연결된다. 보행로와 공원이 하나의 공간처럼 이어지면서 녹지가 주는 개방감은 무한히 확장된다. 비스바덴은 가로수 1만7000본 중 80% 이상이 양버즘나무처럼 잎이 넓은 활엽수다.
가로수가 남다른 도시의 공통점
이들 두 도시는 가로수 한 그루 한 그루를 소중히 가꾼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로수의 목적을 녹지 제공에 두고 있기 때문에 긴 시간을 들여 키운 가로수를 도로 확장과 같은 도시개발사업을 이유로 베어내는 일은 드물다. 병든 나무를 벌채할 때는 나무 상태를 기기로 측정해 시민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남긴다.
이들 도시는 식별번호를 붙여 개체별로 관리한다. 베어내면 반드시 보식한다. 나무가 크게 자랄 수 있도록 식수대를 넓게 만들고, 필요에 따라 자동 물 공급 장치를 설치한다. 어린나무에는 겨울철 낮은 기온과 강한 햇빛으로 갈라지는 피해를 보지 않도록 보호 약품을 바른다.
이들 도시의 또 다른 특징은 거리에 불필요한 가로시설물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자전거 이용률이 높은 프라이부르크에서도 자전거 거치대가 거리의 공간을 넓게 차지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 땅에 고정된 지지대 정도로 간소한 형태를 띠고 있다.
반면 가로수 주변에 벤치를 정책적으로 확대 설치하고 있다. 의자 하나도 가로수 아래에 두면 작은 포켓 공원으로 기능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시민은 물론, 도시가 낯선 관광객들도 편안하게 도시를 돌아볼 수 있다.
시민 곁에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자연
지난 주말 제주참여환경연대가 ‘서광로 가로수길 세밀화 전시회’를 열고, 가로수 선언문을 발표했다. 시민들이 도로공사로 가로수가 벌채된 제주시 서광로를 걸으며 남은 식물과 잘린 식물을 관찰해 서툰 솜씨로 그림을 그렸다. 그 앞을 오가면서도 알지 못했던 식물의 이름과 생김, 보도블록 밖으로 뿌리가 튀어나온 가로수의 열악한 생육 환경 등이 그림으로 구현됐다.
제주에서 가로수에 관한 관심은 점차 커지고 있다. 불볕더위가 잦아지면서 거리에 나무가 절실해진 탓이다. 제주도 차원에서도 탄소 저감을 위해 당장 가장 손쉬운 방법이 도시에 나무를 늘리는 일이다. 정부가 2030년까지 2018년 대비 온실가스 배출량을 40% 절감하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탄소를 줄이기 위한 작업은 제주도를 포함한 모든 지자체의 당면 과제가 됐다.
도로다이어트 시범사업 추진, 도로 부서와 녹지 부서 간 계획 공유와 같이 사람 중심의 가로환경 조성을 위한 움직임도 올해부터 본격화됐다.
그러나 가로수가 풍성해지고, 도민과 관광객이 변화를 체감하기까지 갈 길은 멀다. 도로공사를 위해 간단히 베었다 새 나무를 심는 지금의 방식은 가로수 숫자는 늘릴 수 있지만, 거리에 녹음은 넓힐 수 없다.
‘제주도 도시숲 조례’에 따른 새 가로수 식재 기준은 흉고직경(사람 가슴높이 줄기 지름) 12㎝ 또는 근원직경(뿌리 바로 위 줄기 지름) 14㎝ 이상이다. 이 작은 나무가 자라 거리에 그늘을 드리울 때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가로수 관리대장 전산화도 시급하다. 산림청이 작성한 ‘가로수 조성·관리 매뉴얼’에는 가로수 식재 상황과 생육상태를 조사해 전산 자료화하고, 이를 토대로 도시 여건에 맞는 세부 관리계획을 수립하도록 하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보도를 넓혀 가로수 식재를 늘리거나 식재 방법을 다양해 보행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나무가 크게 자랄 수 있도록 식수대 크기를 적절히 확보하고, 햇볕이 드는 방향과 주변 건물의 위치에 따라 가로수 식재 방법과 방향을 달리하는 고민도 필요하다.
가로수에 대한 시민 인식을 개선하고, 가로수 민원에 대응하기 위한 기준도 세워야 한다. 가로수의 역할이 중요해진 만큼 제주도청에 1명뿐인 도시녹지업무 직원도 보강해야 한다.
가로수는 걷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도심의 핵심 인프라다. 아이나 노인이 자신의 생활 반경 안에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거리는 안전하다. 안전한 거리는 여성을 위한 도시의 중요한 조건이다. 이동이 편하면 대중교통 이용이 늘어나고, 잘 가꿔진 가로수는 도시의 품격과 가치를 드러낸다.
최진우 가로수시민연대 대표는 최근 발간한 책 ‘숲이라는 세계’에서 “가로수가 탄소중립에 효과를 내려면 나무의 부피가 커야 한다”며 “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성과 홍보에서 벗어나, 차도를 좁히고 보도를 넓혀 나무를 크게 키우기 위한 도시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끝<
글·사진=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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