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부르는 팬덤…그리고 ‘감성화된 정치’ [신율의 정치 읽기]
노란봉투법, 방송3법 통과도 여권 공격 수단
감성화된 정치권…선거, 투쟁 과정으로 전락
2022년 8월, 극우 강경파로 알려진 미국의 마저리 테일러 그린 하원의원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자택 수색을 지시한 메릭 갈런드 미국 법무장관의 탄핵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린 하원의원은 취임식이 끝나면 곧바로 바이든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 주장했던 인물이다. 공화당은 2022년 11월 의회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한 직후부터 바이든에 대한 탄핵론을 꾸준히 제기해왔다. 이런 탄핵 주장은 대부분 당내 극우파 의원에 의해 제기됐다.

탄핵은 ‘일반 사법 절차로는 소추나 처벌이 어려운 정부 고급 공무원이나 신분이 강력하게 보장돼 있는 법관 등에 대해 국민의 대표 기관인 국회가 헌법 또는 법률이 정한 바에 소추해 처벌하거나 파면하는 제도’다. 주목할 지점은 ‘일반적인 사법 절차로는 소추나 처벌이 어려운’이라는 부분이다. 지금 탄핵 대상으로 거론됐던 방통위원장이나 검사들이 일반적인 사법 절차로 처벌이 어려운 인물일까.
더불어민주당이 손준성 검사장은 ‘고발 사주’ 의혹을, 이정섭 전 차장검사는 위장 전입과 범죄 기록 불법 조회 등 의혹을 탄핵 사유로 들었다. 손준성 검사장은 해당 사건과 관련해 재판이 진행 중이다. 조만간 1심 재판 결과가 나올 전망이다. 그런데도 일반적인 사법 절차로 처벌이 어려운 경우로 봐야 할까. 이정섭 전 차장검사는 검찰이 11월 20일 비위 의혹과 관련해 용인CC 골프장과 엘리시안 강촌 리조트를 압수수색하며 강제수사에 착수했다. 공수처 특별수사본부 역시 민주당이 이정섭 전 차장검사를 부정청탁금지법과 주민등록법 등 혐의로 고발한 사건을 배당받고, 이 전 차장검사 측에 수사 개시를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수처는 민주당이 패스트트랙까지 태워가며 주도적으로 만들어진 기관인데, 해당 기관이 수사를 하고 있음에도 탄핵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종합해보면, 두 명 검사에 대한 탄핵 소추는 일반적인 사법 절차로는 소추나 처벌이 어려워 주장되는 게 아니다. 제도로 처벌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민주당이 ‘제도 운영의 주체’를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탄핵을 추진한다 보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민주당의 불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가가 탄핵 소추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셈이다. 다만 민주당이 제도 운영의 주체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은, 민주당의 주관적인 판단일 수 있다.
이동관 전 방통위원장 사안도 유사하다. 민주당이 탄핵 소추안을 통과시키기 전에 위원장이 사퇴했기에, 탄핵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민주당은 이를 두고 “이 위원장이 야반도주하듯 꼼수 사퇴한 이유는 명확하다”며 “탄핵 심판을 통해 자신이 벌여온 불법과 위법이 드러날까 두려웠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당이 이동관 전 위원장 ‘불법과 위법 의혹’ 때문에 탄핵 소추를 발의했고 해임이 목적이었다면, 해당 인사의 자진 사퇴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물론 자진 사퇴했다고 이동관 전 위원장에게 제기되는 의혹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의혹 해소를 원한다면 고소나 고발을 하면 된다. 자연인에 대한 위법 여부 수사는 어렵지 않다. 그럼에도 자진 사퇴를 두고 왈가왈부한다면, 민주당의 탄핵 소추 발의에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받을 소지가 있다. 탄핵은 정쟁 무기가 돼서는 안 된다. 탄핵은 권력에 대한 최후의 저항 수단이다. 그럼에도 민주당에서는 새로운 방통위원장이 임명되기도 전에 또다시 제2, 3의 탄핵 주장이 나온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국을 이끌기 위한 수단으로 탄핵을 이용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는 배경이다.
민주당에 여권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이 탄핵만은 아니다. 원하는 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키는 행위 역시, 여권을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민주당은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개정안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이를 보면, 일부 법안의 단독 강행 통과 역시 대여 투쟁 수단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노란봉투법은 지난 20여년간 정치권의 논쟁거리였다. 민주당이 노란봉투법 통과를 그토록 바랐다면, 자신들이 정권을 갖고 있었을 당시에 통과시켰으면 됐다. 민주당이 국회에서 압도적 의석을 차지하게 된 것이 2020년이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 2022년이다. 그 2년 동안 노란봉투법을 통과시켰으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을 테다. 그런데 지금 이를 단독으로 처리하고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비난하고 있으니 어리둥절해진다.
방송3법도 마찬가지다. 해당 법안이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법이라면, 자신들 정권에서 법안을 통과시켰어야 했다. 입법 권력과 행정 권력을 모두 갖고 있을 때는 가만히 있다 지금에서야 단독으로 처리한 만큼,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만일 자신들은 ‘선(善)’하기 때문에 법이 미비해도 문제가 없었지만, 현재 권력은 ‘악(惡)’이기 때문에 해당 법안이 필요하다는 식의 사고에 기반해 단독 처리를 강행했다면, 정치적 사고에 문제가 있다는 의미다. 정치를 ‘선과 악’ 대결 구도로 바라본다는 것은 정치를 실종시키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탄핵이 남발되는 이유도 이런 사고와 관련이 깊어 보인다.
미국 역사에 탄핵이라는 용어가 지금만큼 자주 등장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런 현상은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발생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포퓰리스트적 성향을 강하게 보이고 SNS를 통해 팬덤을 형성시켰다는 점이 ‘탄핵의 정치 무기화’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팬덤이 형성됐다는 것은, 미국 정치가 그만큼 감성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감성화된 정치판은 정치를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보는 시각을 정착시킨다. 이때 팬덤의 지배 아래 있는 정당 혹은 정치 세력은 상대를 완전히 제압하려 든다. 그 과정에서 탄핵이라는 단어가 수시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기를 꿈꾸고 있으니, 그를 추종하는 강성 팬덤과 그런 팬덤의 눈치를 보는 정치인들은 탄핵 주장을 남발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에서의 정치의 감성화는 미국보다 훨씬 심하게 진행 중이다. 미국은 탄핵에 대한 언급만 나오지만, 우리나라는 장관 탄핵을 실행에 옮겼다. 총선을 앞두면 중도층에 어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상인데, 우리나라 정치판은 아직도 강경한 모습만을 보인다. 이 또한 감성화된 정치판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는 무한 투쟁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니, 선거는 투쟁 과정으로 전락하고, 그런 선거판에서는 전부 아니면 전무의 싸움밖에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면 끝이라는 사고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는 더욱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어진다. 정치가 사라지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피해자인 국민이 정치의 감성화와 맞서 싸워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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