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향은의 트렌드터치] ‘육각형 신드롬’의 함정

2023. 12. 11.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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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하고 자존감 높게 태어났다는 세대, 요즘 젊은 친구들은 완벽을 추구한다. 소위 ‘갓생’을 사는 이들은 늘 숨 가쁘다. 신을 뜻하는 ‘갓(God)’과 인생(人生)을 뜻하는 ‘생’이 합쳐진 신조어 ‘갓생’은 목표 지향적인 루틴을 세워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잘 대변해준다.

타인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성실하고 생산적인 삶을 추구하는 이들은 궁극적으로 흠 없는 완벽한 사람을 지향한다. 외모·학력·자산·직업·집안·성격·특기 등 모든 측면에서 소위 어디 하나 빠지는 것이 없는 사람 말이다. 이런 인간형을 가리켜 최근엔 ‘육각형 인간’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 흠 없는 완벽한 인간형 추구
노력 대신 타고난 것에 열광
모든 걸 순위 매기는 분위기
자신을 직시하는 객관화 필요

김지윤 기자

어떤 대상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특성을 비교·분석할 때 사용하는 6각형 이미지를 ‘헥사곤 그래프’라고 하는데, 여기서 모든 기준축이 끝까지 꽉 차 완벽한 모습을 보이면 정육각형이 된다. 그래서 육각형은 완벽이라는 의미로 종종 쓰이는데, 조건과 능력을 수치화한 이 헥사곤 그래프에 꽉 들어찬 사람을 원하는 현상이 ‘육각형 인간’이라는 트렌드를 만들어 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2019년 코로나 위기를 겪는 동안 부의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우리 사회에 ‘노력 신화’가 무너지고 있다. 과거 우리에게 울림을 주었던 ‘고진감래 서사’나 ‘개천에서 용 나는 흙수저 신화’ 대신 태어날 때부터 완벽한 주인공이 바로 등장하고, 데뷔 때부터 모든 것을 다 갖춘 ‘완성형 아이돌’이 더 각광받는다. 태생이 좋은 집안, 완벽한 환경과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다.

패션과 뷰티산업에 불고 있는 ‘올드머니 룩’ 바람도 여기서 기인한다. ‘올드머니(Old Money)’는 집안 대대로 많은 자산을 가진 기득권 상류층을 일컫는 단어로, 신흥 부자를 뜻하는 ‘뉴머니(New Money)’와 구별된다. 뉴머니들이 겉으로 부를 과시할 수 있도록 브랜드 로고가 드러나거나 화려한 컬러의 패션을 선호한다면, 전통 부자인 올드머니는 아는 사람만 아는 브랜드, 고가의 소재를 사용한 단정하고 고상한 분위기의 패션을 선호한다. 또한 승마나 요트처럼 부유층이 즐기는 스포츠와 결합한 룩이나 미국 명문 사립학교 교복에서 유래한 프레피룩 등 자연스럽게 그들의 라이프 스타일이 묻어나는 의상이 올드머니 룩을 표현한다.

타고난 것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은 문화 콘텐트 시장에서도 발견된다. 과거 인기가 높았던 콘텐트를 살펴보면 초반에는 약했던 주인공이 노력을 통해 성장하는 스토리가 주류였다. 반면 요즘 인기 있는 작품은 ‘고생의 과정’이 축약되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콘텐트에서조차 사람들은 노력형 캐릭터가 아닌, 애초부터 세계관 최강자로 시작하는 주인공에 매료되는 것이다.

이런 육각형 신드롬은 그간 널리 퍼진 소셜 미디어의 영향이 크다. 완벽한 라이프스타일을 뽐내는 전 세계의 동년배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나도 그처럼 완벽한 모습을 갖춰야 한다는 유형·무형의 압박이 강해진 것이다. 예전에는 “누가 공부를 더 잘하나”의 단일 차원의 경쟁이었다면, 이제는 외모·패션·특기·부모 등 비교하는 기준이 많아지면서 그 경쟁이 훨씬 더 복잡하고 치열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점수’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식당을 방문할 때도 맛은 좋은지, 가격은 적당한지, 재료는 신선한지, 인테리어는 힙한지, 직원들은 친절한지 세분화해 모두 평가한다. 제품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가격은 싼데 품질은 좋아야 하고, 디자인도 뛰어나며 기업 이미지까지 훌륭해야 한다. 모든 면이 완벽한 육각형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곧 나의 가치를 ‘숫자’로 환산해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에게 완벽함을 보여주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사회적 완벽주의’가 팽배하다. 이에 대해 연구자들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처한 사회적 상황을 점점 더 부담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타인이 자신을 더 가혹하게 평가하기 때문에 더욱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어야만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한다.

육각형 인간의 모습은 모든 것을 지수화하고 랭킹화하는 우리 사회가 주입하는 이상형일지도 모른다. 완벽한 인간을 추구하며 갓생을 살지만, 현실을 깨닫고 될 수 없는 육각형 인간을 바라만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 과장된 사회의 욕망을 거둬내고 자신의 욕망을 직시하는 자기 객관화가 절실하다.

이향은 LG전자 CX담당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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