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사업주의 '일·가정 양립 위한 배려의무' 명시적 인정한 첫 판결 내놔
직원들의 고용승계를 약속한 사업자가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워킹맘에게 시용기간 중 새벽 근무나 공휴일 근무를 강요하고, 이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본채용을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소속 근로자에 대한 사업주의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한 배려의무'를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그 기준을 제시한 판결이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도로관리용역업체 A사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B씨의 부당해고구제 신청을 받아들인 재심판정을 취소해달라며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재판부는 "원심의 판단에는 남녀고용평등법상 일·가정 양립을 위한 배려의무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음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상시 약 6400명의 근로자를 고용해 건물종합관리업 등을 영위해온 A사는 C사가 시행한 고속도로 유지관리용역 경쟁입찰에서 일정 구간의 유지관리용역을 낙찰받아 2017년 4월 C사와 도급계약을 체결했다.
A사는 입찰을 할 때 '근로자의 고용안정을 위해 근로자의 자진퇴사, 정년 도래, 요금수납 부정, 기타 사회통념상 고용이 어려운 경우 등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과업인원을 고용승계하고 고용을 유지하겠다'는 근로조건 이행 확약서를 제출했다.
A사 이전에 해당 고속도로 구간의 유지관리용역을 맡고 있던 회사에 2008년 6월 입사해 8년 9개월째 근무해온 B씨는 2017년 4월 1일 A사와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계약서에는 일근제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고, 수습기간 3개월 중 문제가 있는 경우 사용자가 본채용을 거부할 수 있다는 니용이 포함돼 있었다. 그리고 주휴일과 근로자의 날만 휴일로 인정하고, 계약서에 없는 사항은 현장직 복무규정 등에 따른다고 정했다.
한편 소속 회사가 바뀌기 전 B씨는 고속도로 영업소에서 서무주임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1세, 6세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이었던 만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는 일근직 근로 형태로 일해왔다.
고속도로 수납 업무 등 24시간 계속돼야 하는 회사 업무의 특성상 다른 직원들은 한달에 3~5번 정도 새벽 6시부터 오후 3시까지 초번 근무를 서거나, 공휴일에도 교대로 근무를 섰지만, 회사의 배려로 두 아이를 양육하는 B씨는 초번 근무와 휴일 근무를 면제받았다. B씨가 서야될 초번 근무는 영업관리팀장이 대신 서줬고, 공휴일에는 연차 휴가를 사용해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 들어온 용역업체 A사는 B씨에게 다른 직원들처럼 초번 근무와 공휴일 근무를 서줄 것을 지시했다.
B씨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첫 달인 2017년 4월에는 자녀의 어린이집, 유치원 등원시간에 맞춰 외출을 허락 받아 초번 근무 3회를 모두 수행했다.
공휴일의 경우 2017년 4월에는 공휴일이 없었고, 같은 달 말 회사로부터 '영업관리팀 소속이므로 공휴일에 휴무할 수 없으니 출근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하지만 B씨는 2017년 5월부터 공휴일에 출근하지 않았고, 회사에 '종전 용역업체에서는 공휴일에 근무하지 않았고, 다른 영업소의 서무주임도 공휴일에 근무하지 않으며, 오랜 근무형태를 하루아침에 변경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내용의 경위서를 제출했다.
이에 회사는 B씨에게 '무단결근이 계속되면 초번 근무 시 외출을 허용할 수 없다'는 취지로 얘기했고, B씨는 이후 초번 근무도 서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B씨가 초번 근무를 거부하고, 공휴일 근무날 무단결근했다는 이유로 본채용 평가에서 감점을 해 2017년 6월 30일 본채용 거부를 통보했다.
중앙노동위원회는 A씨에 대한 회사의 채용 거부를 부당해고로 판정했고, 회사는 법원에 이 판정을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1심 재판을 맡은 서울행정법원은 중노위의 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B씨에게 회사의 초번 근무나 공휴일 근무 지시에 따를 의무가 있었는데도 B씨가 이를 이행하지 않았던 사실은 인정했다. 그리고 그 같은 지시 거부가 일응 회사가 본채용을 거부한 정당한 사유가 될 수 있다고 전제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약정된 노무제공 의무를 근로자가 어린 자녀 양육이라는 사유를 들어 이행하지 않았을 때 그러한 근로자의 본채용 거부에 사회통념상의 합리성, 상당성을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를 따져봤다.
재판부는 "부모의 자녀 양육권은 비록 헌법에 명문으로 규정돼 있지는 않지만, 혼인과 가족생활을 보장하는 헌법 제36조 1항, 행복추구권을 보장하는 헌법 제10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한 헌법 제37조 1항에서 나오는 중요한 기본권"이라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헌법상 부모의 자녀 양육권은 우리 사회의 객관적인 가치질서를 이루고 있다고 봐야 하며, 민간 영역에서도 영유아의 양육을 배려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근로관계에서 '양육에 대한 배려 및 지원'에 관한 인식은 보편화되고 있다"고 했다.
재판부는 "입법자는 변화하는 우리 사회의 인식을 구체화해, 종전의 '남녀고용평등법'을 2007년 12월 21일 현재의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로 일부 개정하고, 모성 보호와 여성 고용을 촉진해 남녀고용 평등을 실현함과 아울러 근로자의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함으로써 모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것을 법률의 목적으로 삼아 관련 규정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9조의5(육아지원을 위한 그 밖의 조치) 1항은 '사업주는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를 양육하는 근로자의 육아를 지원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조치를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라며 1~4호에서 ▲업무를 시작하고 마치는 시간 조정 ▲연장근로의 제한 ▲근로시간의 단축, 탄력적 운영 등 근로시간 조정 ▲그 밖에 소속 근로자의 육아를 지원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열거하고 있다.
재판부는 이어 "이러한 점에 비춰 보면, 이 사건 본채용 거부통보는 우리 사회가 사회적·경제적 상황 변화에 상응해 이뤄낸 공감대나 입법자가 법률의 제정을 통해 구현하고자 하는 가치를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이것이 이 사건 본채용 거부통보가 사회통념상 상당성을 갖췄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이 법원의 기준이 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재판부는 "원고 회사가 초번 근무나 공휴일 근무를 지시한 것은 일견 외견상으로는 취업규칙 및 복무규정에 따른 적법한 것이고, 본채용 거부통보의 전제가 되는 수습평가 결과 또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라면서도 "하지만 여러 사정을 종합해 보면 원고 회사는 참가인(B씨)의 수습기간 및 수습평가 과정에서 일·가정 양립을 위한 배려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형식적으로 관련 규정을 적용해 실질적으로 참가인이 '근로자로서의 근무'와 '어린 자녀의 양육' 중 하나를 택일하도록 강제되는 상황에 처하게 했고, 그 결과 참가인이 초번 근무와 공휴일 근무를 수행하지 못해 수습평가의 근태 항목에서 전체 점수의 절반을 감점 당하는 결과가 초래됐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이 사건 본채용 거부통보는 사회통념상 상당하다고 인정하기 부족해 효력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반면 2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A사의 손을 들어줬다. 2심은 제1심판결을 취소하고, B씨의 손을 들어준 중노위의 재심판정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먼저 재판부는 "시용기간 중에 있는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시용기간 만료 시 본 계약의 체결을 거부하는 것은 사용자에게 유보된 해약권의 행사로서, 당해 근로자의 업무능력, 자질, 인품, 성실성 등 업무적격성을 관찰·판단하려는 시용제도의 취지·목적에 비춰 볼 때 보통의 해고보다는 넓게 인정되나, 이 경우에도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해 사회통념상 상당하다고 인정돼야 한다"라는 대법원 판례를 원용했다. 상당성은 인정돼야 하겠지만 기본적으로 통상적인 해고에 비해 시용기간 중인 근로자에 대한 본채용 거부의 경우 사용자의 재량 범위가 넓게 허용돼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다.
그리고 재판부는 B씨에 대한 회사의 본채용 거부 통보는 객관적으로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해 사회통념상 상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회사의 초번 근무나 공휴일 근무 지시에 따라야 함에도 상급자의 지적을 받고도 거듭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점 ▲결근 시 사전에 결근계를 제출하는 등 회사가 정한 절차를 이행하지도 않은 점 ▲B씨가 종전 회사의 근무형태나 다른 일근직 근로자의 근무형태를 들어 공휴일 근무를 거부했을 뿐 회사에 어린 자녀 양육 때문에 공휴일 근무가 불가능하다는 사정을 설명하거나 이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연가 사용허가 등)를 요청했다고 볼 만한 자료가 없는 점 ▲공휴일의 경우 배우자 등이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B씨가 회사에 다른 가족들이 공휴일에 어린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지 않는 이상 회사가 그러한 사정을 먼저 파악하고 해결 조치를 취할 것을 기대하기는 곤란한 점 등을 이 같은 판단의 근거로 들었다.
재판부는 "원고 회사의 참가인에 대한 이 사건 본채용 거부는 정당하므로, 이와 달리 이 사건 본채용 거부가 부당해고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이 사건 재심판정은 위법하다"라며 "원고 회사의 청구는 이유 있으므로 이를 인용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다시 결과가 뒤집혔다.
대법원 역시 "참가인이 육아기 근로자라는 사정만으로 근로계약 내지 취업규칙상 인정되는 초번, 공휴일 근무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며 B씨에게 회사가 지시한 초번 근무나 공휴일 근무 의무가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대법원은 1심 재판부와 마찬가지로 '부모의 자녀 양육권'이 헌법상 중요한 기본권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조항을 언급하면서 회사의 본채용 거부통보가 사회통념상 상당성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남녀고용평등법은 양육권의 사회권적 기본권으로서의 측면을 법률로써 구체화해 근로자의 양육을 배려하기 위한 국가와 사업주의 일·가정 양립 지원의무에 관해 규정하고 있다"라며 "특히 남녀고용평등법 제19조의5는 사업주가 만 8세 이하 또는 초등학교 2학년 이하의 자녀를 양육하는 근로자(육아기 근로자)의 육아를 지원하기 위해 업무를 시작하고 마치는 시간 조정, 연장근로의 제한, 근로시간의 단축, 탄력적 운영 등 근로시간 조정을 비롯해 그 밖에 소속 근로자의 육아를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했다"고 밝혔다.
이어 "따라서 자녀 양육에 대한 부담으로 발생하는 근무상 어려움을 육아기 근로자 개인이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고 볼 수 없고, 사업주는 그 소속 육아기 근로자의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기 위한 배려의무를 부담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밝혔다.
또 재판부는 "이때 사업주가 부담하는 배려의무의 구체적인 내용은 근로자가 처한 환경, 사업장의 규모 및 인력 운영의 여건, 사업 운영상의 필요성 등 제반 사정을 종합해 개별 사건에서 구체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재판부는 이번 B씨 사건에 대해 "원고가 육아기 근로자에 대한 일·가정 양립을 위한 배려의무를 다하지 않고 본채용을 거부했다고 볼 여지가 상당하므로, 본채용 거부통보의 합리적 이유, 사회통념상 상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볼 여지가 크다"라며 "원심으로서는 다소 엄격한 기준에 따라 원고가 시용기간 및 평가과정에서 육아기 근로자인 참가인에 대해 일·가정 양립을 위한 배려를 다했는지를 심리하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2심 재판부와 달리 B씨가 특별히 회사에 어려운 사정을 알리지 않았더라도 회사가 그 같은 사정을 알 수 있었다고 봤다.
재판부는 "회사는 B씨가 육아기 근로자로서 (자녀를) 보육시설에 등원시켜야 하는 초번 근무 시간이나 공휴일에 근무해야 할 경우 양육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사정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영업소의 여건과 인력 현황 등을 고려해 보면 회사가 공휴일 근무 관련 육아기 근로자인 B씨에 대해 일·가정의 양립을 위해 노력할 것을 기대하는 것이 과도하다고 보이지 않는다"라며 "수년간 지속한 근무 형태를 갑작스럽게 바꿔 보육시설이 운영되지 않는 공휴일에 매번 출근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자녀 양육에 큰 저해가 되는 반면 서무주임인 B씨에게 공휴일 근무를 지시해야 할 회사의 경영상 필요성이 크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은 B씨가 본채용 거부통보를 받은 지 6년 6개월 만에 나왔다. 2심 선고 이후 대법원 심리에만 4년이 걸렸다.
대법원 관계자는 "사업주에게 소속 근로자에 대한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한 배려의무가 인정된다는 것을 최초로 명시적으로 인정하고 사업주가 부담하는 배려의무의 구체적 내용을 판단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한 판결"이라고 이번 판결의 의의를 밝혔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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