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마약왕이 검거된 건 다름 아닌 영화 때문이었다
[이준목 기자]
호아킨 구스만(Joaquin Guzman)은 멕시코의 악명높은 마약 범죄조직 시날로아 카르텔의 보스이며, 키가 작다는 의미의 '엘 차포(El Chapo, 땅딸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엘 차포는 한때 전세계 마약시장을 장악하며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았고, 거대한 조직과 잔혹한 범죄수법을 앞세워 공권력조차 함부로 건드릴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21세기의 알 카포네, 혹은 파블로 에스코바르로 불리우는 엘 차포는 어떻게 세상을 뒤흔들었을까.
12월 8일 방송된 MBC 범죄실화 스토리텔링 <세계경찰-슈퍼폴> 6회에서는 '희대의 탈옥수-마약왕 엘 차포' 편을 통하여 멕시코를 혼돈으로 몰아넣은 마약왕의 충격적인 실체를 조명했다.
2019년 10월, 멕시코 경찰은 오비디오 구스만이라는 인물에 대한 검거작전에 나선다. 오비디오는 바로 엘 차포의 아들이자 거대 마약밀매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700여명에 이르렀던 마약 조직원들은, 붙잡힌 오비디오를 풀어줄 것을 경찰에 요구하며 시민들을 인질로 삼아 사실상 시날로아 도시 일대를 점거하는 대규모 폭동을 일으켰다.
당황한 멕시코 경찰은 오비디오를 통하여 회유를 시도했지만 조직원들은 이를 거부했다. 경찰은 3천5백명에 이르는 인력을 배치했지만, 마약조직과 전면전을 벌이게되면 양측과 시민들까지 대규모 유혈 사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결국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이 나서서 시민들의 안전을 고려하여 일단 오비디오를 석방시키는 결정을 내린다. 국가 공권력이 일개 범죄조직의 테러에 공개적으로 굴복한 순간이었다. 그만큼 멕시코에서 마약조직의 위세가 얼마나 거대한지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면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약조직의 만행은 오비디오가 풀려난 이후에도 멈추지않았다. 마약 조직원들은 약 3주후에는 오비디오 검거작전에 가담했던 한 젊은경찰을 본보기 차원에서 백주대낮에 총격으로 잔혹하게 암살하기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멕시코 시민들중에는 이러한 마약범죄조직을 오히려 지지하고 옹호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엘 차포를 로빈 후드와 비교하며 '의적'이라고 칭송했다. 심지어 마약조직 두목을 신격화하여 신전을 만들고 기도하며 숭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범죄자에 불과한 엘 차포가 사람들에게 의외의 지지를 얻은 것은, 마약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익을 이용하여 가난한 서민들에게 기부하고 마을에 교회와 도로를 만들어주는 등 자선사업가들이나 할만한 통큰 선심을 베풀어왔기 때문이었다. 엘 차포는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과시욕이 강했던데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꿰뜷고 있었다.
엘 차포를 추적해온 잭 라일리 DEA(미국 마약단속국) 전 부국장은 "엘 차포와 그 조직은 지금껏 보아온 어느 조직보다 잔혹하다. 지난 10년간 수만명의 사람들이 그들 때문에 죽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마약범죄를 취재해온 저널리스트 헤수스는 "멕시코의 10대와 어린 아이들은 매우 가난하다. 그들에게는 마약 일을 하는 것외에는 다른 미래가 없다. 마약 조직원들은 아이들에게 미래를 제시하고 나와 일하면 큰 돈을 벌수 있다고 유혹한다. 그리고 짧은 시간 이용하다가 죽여버린다"고 마약 조직의 어두운 실상을 폭로했다.
엘 차포는 의식주를 해결하여 시민들의 환심을 산후 그들을 이용하여 자신을 위한 악행의 도구를 삼았다. 자신을 추적하는 경찰과 언론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했고,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고 부하 조직원들까지 처형하기도 했다.
엘 차포의 악명이 처음 세상에 드러난 것은 1993년 오캄포 추기경 살인사건부터였다. 멕시코인들에게 국민적 존경을 받던 오캄포 추기경이 범죄조직간의 분쟁에 휘말려 잔혹하게 살해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오캄포는 첫 번째로 체포되었고 세상에 그의 존재가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한편으로 마약-살인과 더불어 엘 차포의 악명이 더욱 높아진 또다른 계기는 '탈옥'이었다. 엘 차포는 1993년 첫 번째 검거 이후 2001년 1월에 탈옥했다. 멕시코 경찰은 오랜 추적 끝에 지난 2014년 엘 차포를 두 번째로 체포하여 연방 교도소에 수감했다. 하지만 2015년 7월, 엘 차포는 이번에도 또다시 교도소를 탈옥하는데 성공했다.
엘 차포는 어떻게 깜쪽같이 사라질수 있었을까. 알고보니 엘 차포의 아들과 조직원들은 1년 전부터 교도소 인근의 땅을 구매하여 교도소로 이어지는 지하 터널을 파며 철저하게 탈옥을 준비해온 상태였다.
탈출 터널의 높이는 170cm에 길이는 1.6km에 이르렀고 심지어 엘 차포만을 위한 조명과 배관, 환풍시설, 심지어 오토바이 레일까지 만들어놓았다. 탈출로를 건설하는데 들인 비용만 5천만달러(한화 676억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교도관들을 매수한 비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조직원들은 엘 차포의 시계 안에 GPS를 달아서 엘 차포가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땅굴을 파는 용의주도함까지 보였다. 엘 차포는 가만히 옥중에서 앉아서 기다리다가 터널이 완성되자 샤워실 지하를 통하여 유유히 걸어서 교도소를 빠져나갔던 것.
헤수스는 "엘 차포의 탈옥은 공권력보다 자신이 강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하며 "조직원들이 지하터널을 짓느라 바닥의 시멘트를 부술 때 분명히 소음이 났을 것이다. 죄수들은 소음을 들었지만, 교도관들은 못들었다고 했다. 사실 교도관들도 (엘 차포의 탈옥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법과 공권력을 비웃는 엘 차포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2009년 미국 유명시사지 <포브스>에서 엘 차포는 범죄자임에도 세계의 갑부 순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마약사업으로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린 엘 차포의 재산은 개인 순자산만 1조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미국 정보기관에서는엘 차포의 마약조직 규모는 연간 수익만 30억달러(한화 4조원)이상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엘 차포는 자신이 근거지인 멕시코 시날로아 지역에서 마약 유통은 물론 직접 와 개발까지 해가며 마약 사업을 확장했다. 전문가들은 엘 차포의 조직에서 유통된 마약이 미국은 물론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아시아와 한국까지도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가장 피해가 심한 미국에서는 하루 평균 300여명이 마약 중독으로 사망하고 있다. 필라델피아등 일부 대도시에서는 '마약 중독자들의 거리'가 있어서 길거리에서도 마약을 하는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미국으로 흘러가는 전체 마약 시장 규모의 25% 정도가 엘 차포가 장악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엘 차포 조직은 탈옥만이 아나리 마약 밀수와 유통에 이어서도 지하 터널을 즐겨 사용했다. 헤수스는 "엘 차포는 마약을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밀수하는데 터널을 이용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평가하며 "그가 얼마나 많은 마약을, 얼마나 오랜 기간 옮겨왔는지는 아무도 모르다. 엘 차포가 지은 터널을 보라, 어설프지 않고 아주 전문적이다"라고 평했다.
현재 공식적으로 발견되어 엘 차포의 밀수 루트로 밝혀진 터널만 200여개가 넘는다고 한다. 잔혹하고 용의주도한 엘 차포는 터널 공사가 마무리될 무렵이면 증거를 인멸하기 위하여 인부들을 단체로 살해하기도 했다.
참다못한 미국와 멕시코 정부에서도 각각 경찰과 정보기관, 군부대까지 총동원되어 대대적인 엘 차포 체포작전에 나섰다. 하지만 엘 차포를 붙잡는 일은 쉽지않았다. 수사시관이 몇 차례나 엘 차포의 은신처를 찾아내 습격했지만 언제나 한발 앞서서 도주하곤 했다.
잭 라일리 당시 부국장은 "엘 차포는 내가 만난 최고의 적이었다"고 회상하며 "그는 항상 도주로를 확보하고 있었고 다수의 주민과 군대, 경찰을 포섭했다. 우리가 가까이가면 항상 알아차렸다"며 고충을 설명했다.
엘 차포와 수사기관의 정보전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수사기관들은 엘 차포의 측근들을 도청하여 수사망을 좁혀갔고, 엘 차포는 오히려 자신의 뒤를 쫓는 라일리의 목에 현상금을 내거는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라일리를 비롯한 관계자들은 엘 차포를 추격하면서 한편으로 언제 어디서 보복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견뎌내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 그토록 용의주도하던 엘 차포의 꼬리가 잡히게 된 계기는 엉뚱하게도 영화였다. 엘 차포의 일대기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를 소재로 한 영화제작 문의가 쇄도했다. 평소 과시욕이 강하던 엘 차포 역시 자신의 이야기로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진다는데 무척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엘 차포는 한창 수배 중인 상황에서 영화 관계자들과 직접 접촉하는 무리수를 저질렀고, 이는 그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가 된다.
미국의 유명한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숀 펜도 영화제작을 위하여 엘 차포와 만남을 시도했다. 숀 펜은 실제로 엘 차포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사진까지 찍었고 해당 내용이 당시 유명 잡지에도 실린바 있다. 그리고 이를 주시하던 수사기관은, 한 은신처로 들어가던 숀 펜의 모습을 통하여 엘 차포의 정확한 위치를 포착해낼 수 있었다.
멕시코 해병대는 이번에야말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엘 차포의 은신처를 기습했다. 엘 차포는 다급히 지하로 몸을 숨겼지만, 이미 그의 수법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던 해병대는 마치 두더지잡기 게임이라도 하듯 포기하지 않고 하루종일 은신처 인근의 맨홀을 샅샅이 수색한 끝에 마침내 엘 차포를 세 번째로 체포하는데 성공했다. 라일리는 엘 차포의 체포 소식을 듣고 "내 인생 최고의 날이었다"는 소감을 전하며 기뻐했다.
체포 당시 촬영된 영상에서 엘 차포는 악명높은 마약왕의 이미지가 무색하게 옷도 제대로 차려입지 못한채 초췌하고 불쌍한 몰골을 하고 있다. 심지어 이송되는 와중에도 요원들에게 '자신을 놓아주면 3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간절히 호소하며 회유를 시도했다고 한다.
멕시코와 미국은 합의 끝에 엘 차포를 탈옥하기 힘든 미국 교도소로 이송하기로 결정했다. 2016년 1월, 미국으로 이송되어 감옥에 수감된 엘 차포는 재판에서 끝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비참한 몰락을 맞이한 엘 차포는 죄수복을 입은 초라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공개되기도 했다. 엘 차포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범죄들은 지금까지도 추가 재판이 진행중이다.
또한 2023년에는 엘 차포의 아들 오비디오에게도 재검거 작전이 펼쳐져서 결국 부자가 모두 체포되기에 이른다. 엘 차포의 조직원들은 이번에도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멕시코 정부의 대대적인 소탕으로 결국 모두 진압되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멕시코와 미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엘 차포의 거대한 마약 제국은 끝내 그렇게 종말을 고했다.
마약범죄를 오랫동안 수사해온 김대규 수사관은 최근 국내에서도 마약의 심각성을 언급하면서 해외처럼 마약범죄자의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한 김 수사관은 "마약밀매자를 잡고나면 가장 먼저 하는 말이 '이렇게 쉽게 돈을 버는데 힘든 일을 왜 합니까?'라고 하더라"는 충격적인 일화를 밝히며, 젊은이들이 마약범죄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마약으로 잠시 쾌락을 얻거나 돈을 벌수는 있지만, 어떤 과정을 거치더라도 그 결말은 결국 비참할 수밖에 없다. 한때 부와 권세를 다 누렸던 마약왕의 초라한 몰락이 우리에게 주는 반면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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