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Stage]"정말 그녀를 잘 아나요?"…추리소설같은 네 남녀의 '외도 진실찾기'
해럴드 핀터 원작, 네 남녀의 외도를 둘러싼 진실 찾기
“당신이오, 빌?”
새벽 네 시, 모두가 잠든 시간 불쑥 전화를 걸어 빌을 찾는 제임스의 물음은 마치 그가 빌과 잘 아는 관계라는 느낌을 준다. 실상은 부인 스텔라가 바람을 피웠다는 고백을 듣고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상간남을 찾는 분노의 호명이다. 연극 ‘컬렉션’은 누구의 말도 믿을 수 없는, 하지만 모두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보고 듣는 확증편향 속 네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낸 수작이다.
팽팽한 긴장 속 진실과 거짓, 침묵과 강변을 통해 작품을 끌고 나가는 강신구, 김신기, 최나라, 정원조 네 배우는 입을 모아 어렵지만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말한다. 서울시극단 소속 배우가 총 다섯 명인데 그중 네 명이 출연한 ‘컬렉션’은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은 배우들 간 호흡이 두드러져 보인다. 김신기 배우는 컬렉션이 극단 단원들로만 올리는 첫 작품이라고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강신구 배우하고는 1997년부터 극단에서 함께하고 있으니 벌써 27년이네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하느라 어찌 보면 지긋지긋하다 싶지만, 상대에 대한 익숙함과 자연스러움이 작품에 그대로 녹아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올해 마지막 작품으로 컬렉션이 정해졌을 때 배우들 사이에선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만, 공통으로 ‘흥미롭다’는 평이 나왔다고 한다. 해럴드 핀터 작가를 평소 좋아했다는 빌 역의 정원조 배우는 일반적인 작품과 다른 작가만의 특이점에 주목했다고 한다.
“컬렉션을 한다고 해서 굉장히 기뻤습니다. 보통 한 가지 목적을 갖고 등장인물들이 그 목적을 향해 가는 작품이 있지만, 컬렉션은 각자 인물이 다른 목적을 갖고 부딪히기 때문에 많은 대사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더 에너지 넘치는 이야기라 흥미로웠죠. 특히 대사 하나하나가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어서 대본 분석 때도 굉장히 재미있게 작업할 수 있었습니다.”
작품은 부부인 제임스와 스텔라,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해리와 빌이 한 사건을 두고 갈등하는 과정을 조명한다. 제임스는 스텔라가 출장지에서 빌과 외도했다는 이야기에 사건의 전말을 밝히려 추적에 나서지만 그럴수록 진실은 미궁에 빠져든다.
스텔라는 갈등의 단초를 제공하지만, 작품에서 침묵을 무기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다. 최나라 배우는 그 공백을 사유의 순간이라 규정한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 부조리극 하면 해럴드 핀터라고 배웠기 때문에 어렵게 느꼈지만, 극을 살펴보면 하나의 플롯을 가지고 사건의 흐름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진짜 삶처럼 이 시각에서 바라보다 또 저 시각에서도 바라보고, 그 간극의 공백에 사유할 수 있는 요소가 녹아있는 작품이에요. 이 과정을 매력이라고 느끼는 분은 작품을 더 즐겁게 보실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 정말 그녀를 잘 알아요?” 아내의 외도 상대로 추정되는 빌로부터 이 말을 들었을 때 제임스는 화를 내기보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인다. 아내 스텔라가 자신에게 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틈입한 순간, 제임스의 확신은 힘을 잃은 의심으로 전락한다. 제임스 역의 강신구 배우는 감정이 변화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다. “사실 제임스가 믿고 있는 사실의 결론, 마침표를 찍기 위해선 사실이란 정보가 필요한데 정보는 오직 각자의 진술뿐이고 그 정보들에는 진실과 거짓이 혼재하죠. 제임스는 자기 나름대로 이야기를 직조해 결론을 내고 싶어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게 됩니다. 통상 작품을 할 땐 상대 배역을 배려하면서 연기를 하는데 이 작품은 굳이 배려가 필요 없는 작업이었어요. 상대가 무슨 말을 하건 내 생각이 옳다고 믿는 캐릭터인 거죠. 자기 생각대로 끼워 맞추는 것, 그게 컬렉션 속 인물들의 역할이고, 그렇게 가다 보면 어느새 작품이 끝나있죠. 결론이 없는 상태로요.”
제임스가 추적하는 사건의 진실은 결국 끝까지 드러나지 않고 작품은 막을 내린다. 김신기 배우는 “나는 작품이 정말 어려웠어요. 그런데 모호하다고 보는 그 결말은 오히려 현실의 여러 문제가 부딪혀서 나온 것으로 느껴졌죠. 지금 이 시대에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작품과 같은 결말이 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빌의 경우엔 자신의 야망 때문에 해리를 버릴 수 없고, 해리 역시 내 명성이 있으니까 대외적으로 이야기가 알려져서 좋을 게 없으니 함구할 테고. 제임스와 스텔라 역시 사회적 입장을 고려해본다면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가짜가 얼마든지 진실처럼 비춰질 수 있는 상황과 이를 추동하는 각 캐릭터의 대사는 그래서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관객에게 환기한다. 변유정 연출은 작품에 대해 “어쩌면 1960년대 이 작품을 쓸 때 해럴드 핀터가 미래를 예측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컬렉션은 각 캐릭터의 입장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볼 때마다 그 결말을 달리 받아들일 수 있는 입체적인 작품이다. 네 배우는 그런 매력을 만끽하고 싶으시다면 N차 관람을 추천한다고 강조했다. “어떤 인물이 더 당위성을 가져가는가에 초점은 맞추고 계속 그 생각을 극의 진행과 함께 맞춰가면서 보신다면 재미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누구 말이 사실일까, 누구 말이 진짜고 거짓일까 같이 추리하면서 보는 게 피곤할 수도 있지만,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시대를 사는 관객 입장에선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사람 간 다른 입장을 통해 자신의 관점을 보다 정교하게 할 수 있으실 겁니다.”
공연은 오는 10일까지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진행된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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