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사가 최고 양조 책임자... 보기만 해도 환상적이었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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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닝쇼벤 수도원 전경 |
| ⓒ 윤한샘 |
<장미의 이름>이나 <다빈치 코드> 같은 영화에 나오는 수도원은 신비롭고 엄숙한 곳으로 묘사된다. 그곳의 수도사는 세상의 비밀을 풀고 인류를 구원할 열쇠를 쥔 존재다. 유럽 문화가 생경한 이들은 영화 속 이미지에서 종교 코드를 배우곤 한다. 수도원 생산 제품에 프리미엄 라벨이 붙은 이유도 이런 코드에서 연유하는 고귀하고 한정된 가치를 믿기 때문일 것이다.
맥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맥주는 가격이 낮고 접근이 쉬운 대중 상품의 대표 주자였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이런 맥주 세계에 빛을 내고 있는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수도사들이 수도원 양조장에서 맥주를 만든다는 진정성이었다. 트라피스트 맥주에 붙은 프리미엄은 향미와 품질이 아닌, 주체와 장소에 있었다.
유럽 젊은이들은 더 이상 수도의 삶에 투신하지 않는다. 남은 수도사는 점점 늙어갔다. 이런 수도원의 현실은 그동안 지켜왔던 진정성에 물음을 남기며 실존적 문제를 야기했다. 다시 말해, 트라피스트 수도원 맥주가 점점 수도사들의 손에서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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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 트라페 양조장 전경 |
| ⓒ 윤한샘 |
1881년 프랑스 몽-데-까(Mont-des-cats) 수도사들이 프랑스 혁명가들의 탄압을 피해 네덜란드 브라반트 틸부르크로 피신했다. 이들이 머문 곳은 작고 허름한 양우리였다. 여러 어려움에도 수도사들은 그곳을 수도원으로 개척했고 자신들을 받아준 네덜란드 왕 빌렘 2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코닝쇼벤, 즉 왕의 농가라는 이름을 붙였다.
맥주 양조장은 수도원 건립과 운영 자금을 위해 1884년 지어졌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94년 새로운 수도원이 증축됐고 코닝쇼벤 트라피스트 맥주도 꾸준히 성장했다. 맥주에 큰 변화가 생긴 건 1969년이었다. 수도원이 스텔라 아르투아와 협력을 결정한 것이다. 다양한 라거 맥주들이 등장했지만 수도원 맥주라는 정체성은 흐려지고 말았다.
1979년 스텔라 아르투아와 관계가 종료되고 수도사들이 다시 양조장에 복귀하면서 코닝쇼벤 맥주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라 트라페라는 브랜드를 붙이고 두벨과 트리펠 같은 트라피스트 맥주 스타일을 출시한 것이다.
라 트라페(La Trappe)는 트라피스트가 태동한 프랑스 라 트라페 수도원에 대한 헌정이었다. 이후 라 트라페 블론드, 엥켈, 위트 같은 다양한 맥주들이 선보였고 1991년에는 쿼드루펠(Quadrupel)이라는 최고의 맥주를 출시했다.
쿼드루펠은 불투명한 짙은 갈색에 알코올 10%를 품은 벨기에 스타일 맥주다. 우아한 건자두, 블랙베리, 제비꽃 향속에 뭉근한 쓴맛과 단맛이 이루는 밸런스는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깊고 묵직한 바디감은 부드럽게 올라오는 알코올 향과 어울려 기품어린 자태를 뽐낸다. 라 트라페 쿼드루펠은 벨기에 수도원 맥주 스타일의 명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독보적인 위치로 올라섰다.
하지만 수도사들이라 해도 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었다. 고된 양조 작업을 지속하기도 어려웠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라 트라페 인기는 높아졌고 생산량은 계속 늘어갔다. 결국 1999년 수도원은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네덜란드 맥주 기업 바바리아에게 맥주 생산을 맡기기로 한 것이다.
맥주 생산은 원활해졌지만 다른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국제트라피스트협회(ITA)에서 라 트라페 맥주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위탁생산이 트라피스트 맥주의 가치를 훼손했다고 생각한 ITA는 트라피스트 맥주 인증 라벨 ATP(Authentic Trappist Product)를 회수하며 자격을 박탈했다.
트라피스트 맥주로 복귀한 라 트라페
2005년 ITA는 수도사가 맥주 생산과 품질을 관리 감독한다는 조건 하에 라 트라페에게 ATP 라벨을 허용했다. ITA 또한 수도사 감소와 노령화 문제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재 라 트라페는 10개 트라피스트 맥주 중 유일하게 바바리아 자회사인 코닝쇼벤 NV에 의해서 생산되고 있다. 물론 최고 양조 책임자는 수도사다.
유럽 트라피스트 맥주 기행 종착지로 코닝쇼벤 수도원을 결정한 것은 이런 라 트라페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라 트라페 한국 수입사의 도움으로 특별 초청을 받은 덕분에 수출 담당자가 직접 양조장 투어와 맥주 시음을 함께 하기로 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코닝쇼벤 수도원은 평화 그 자체였다. 수도원에 온 것을 실감하며 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에게 큰 키에 듬직한 체구를 가진 남자가 다가왔다. 자신을 디터 로월스라고 소개한 그는 턱까지 내려오는 멋진 수염을 갖고 있었다. 빙긋 웃는 그의 손에는 방문객을 위한 노란 조끼가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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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조용수 재활용을 위한 시설 |
| ⓒ 윤한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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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옛 양조장의 모습 |
| ⓒ 윤한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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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양조장의 모습 |
| ⓒ 윤한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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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도원 지붕에 있는 태양광 패널 |
| ⓒ 윤한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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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민들을 위한 주말 농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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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로프로칼, 코닝쇼벤 수도원의 초기 양우리에서 외관을 가져왔다. |
| ⓒ 윤한샘 |
트라피스트 맥주 중 유일한 벨지안 밀맥주인 위트는 부드러운 바나나와 섬세한 향신료향이 녹아있었다. 2009년 라 트라페 125주년을 맞아 출시된 이시도르는 1884년 코닝쇼벤 최초의 브루마스터였던 이시도루스(Isidorus)를 기념하는 맥주였다. 7.5% 알코올에 앰버색을 품은 이 맥주는 캬라멜과 수지 향 그리고 섬세한 쓴맛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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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트라페 맥주들 |
| ⓒ 윤한샘 |
라 트라페를 나서며 가슴이 충만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도원 맥주가 보여주는 공존과 상생의 의미를 마지막 여정에서 볼 수 있어 감사했다. 맥주를 통해 좋은 문화와 세상을 만드는 것, 이 기행은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한국에서 맥주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기를, 투스트 그리고 상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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