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키신저, 코콤, 그리고 대한민국
냉전 유물 ‘코콤’이 떠올라
신냉전 도래가 분명해졌다
세계화 의존, 체력부실 韓경제
초비상인데 국민에게 희망줄
정치 리더십은 어디 있는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달 30일 사망했다. 3일 후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이 대중국 제재를 위해 코콤(COCOM·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 같은 협의체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코콤은 냉전시대 미국 주도의 서방이 공산권에 대한 전략물품 수출을 막으려 만든 기구다. 냉전 해체의 아이콘이 사라지자마자 냉전의 유물이 떠올랐다.
키신저 전 장관은 미·중 화해 시대를 열어젖히며 세계 질서를 재편했다. 1971년 그의 중국 방문 이후 미·중 수교, 글로벌 데탕트가 이뤄졌고 결국 공산권 붕괴까지 이르렀다. 키신저의 날갯짓이 부른 나비효과였다.
49년 창설된 코콤은 공산권 봉쇄 정책의 핵이었다. 초기 금수 전략물자가 400여 품목에 달했고 위반 시 대미 수출이 최대 5년 금지될 정도로 강도가 셌다. 80년대 이후 키신저발 데탕트가 무르익자 코콤 단속 품목은 160여개로 대폭 줄었다. 코콤은 공산권 붕괴 후 95년 자연스럽게 해체됐다.
세계화 물결이 도래하면서 코콤은 역사 속 유물이 된 듯했다. 그런데 2023년 말에 소환됐다. 미국은 과거 공산주의 블록처럼 권위주의 국가들에 첨단기술이 흘러가면 안 된다며 중국에 대한 디커플링(공급망 단절), 디리스킹(위험 완화) 전략을 구사했다. 갖은 제재에도 중국이 최신 7나노미터 공정 반도체를 장착한 휴대폰을 선보이고 자원 무기화로 맞불을 놓자 코콤식 봉쇄까지 들이 밀었다. 신냉전 도래가 분명해졌다. 40년 전인 1983년 2월 키신저는 “중국이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레이건 행정부에 코콤 규제를 완화해 대중 기술 이전을 하라고 촉구했다. 격세지감이다.
미국이 냉전의 보검까지 꺼내겠다는 건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뜻한다. 누적된 중국 중심의 분업화, 세계화가 금방 사라지진 않더라도 상당기간 궤도 이탈은 불가피하게 됐다. 게다가 내년 11월에 미 대선이 열린다. 민주·공화 양당의 정책과 성향은 극명히 갈리지만 반중 정서만큼은 일치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중국 때리기가 계속될 것이다. 코콤식 해법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이유다.
세계화 수혜를 본 우리는 비상이다. 미·중 갈등, 원자재가 급등으로 지난해 역대 최대인 478억 달러 무역적자를 기록했고 올해도 적자폭이 150억 달러 안팎으로 예상된다. 수출 부진은 생산·소비·투자 지표에도 도미노 타격을 안기고 있다. 기초체력 부실은 더 심각하다. 잠재성장률은 1%대로 주저앉았다(경제협력개발기구 기준). 세계 최고 수준의 가계부채, 세계 최고 속도의 국가부채는 경제의 화약고가 된 지 오래다. 한 달 새 외신에서 ‘한국은 끝났다’ ‘한국은 소멸하는가’ 등 종말론적 기사들이 쏟아졌다. 저출산 문제, 그에 따른 노동생산성 저하를 꼬집었다. 과장이 있긴 하나 우리 경제가 국내외 급변에 대처할 잠재력이 있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이럴 때 기대는 게 리더십이다. 정부가 통찰력 있는 정책을 제시하고 여야가 합심해 국민을 설득하고 이끈다면 헤쳐나가지 못할 역경은 없다. 외환위기, 금융위기 극복이 이런 바탕에서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경기 부진에 대한 돌파구도, 국가 비전을 향한 추진력과 국민의 뜻을 모을 소통도 정부 안에서 보기 어렵다. 잼버리 부실 개최, 엑스포 유치전 참패 등 망신이 쌓이며 국격은 추락 중이다. 진영 논리에 매몰된 정치권은 총선용 사생결단만 있을 뿐 민생과 국가 미래는 관심 밖이다.
88 서울올림픽 이후 공산권과의 교류가 본격화했을 때다. 소련과의 전자교환기 합작 생산, 불가리아로의 컴퓨터 수출이 코콤 규정 때문에 중단됐다. 당시 정부는 한쪽에서는 공산권 수교, 한쪽에서는 미국 설득을 통해 코콤의 허들을 넘었다. 올림픽 이후 2년간 평균 3.5%에 그쳤던 수출 증가율은 공산권 수교가 본격화한 91년부터 5년간 평균 14.3%에 달했다. 정부가 앞장서 변화하는 환경에 재빨리 대응해 수출의 지평을 넓혔다.
제2 코콤 대응도 시급하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지난 6일 엑스포 유치 불발로 흔들리는 부산 민심을 달래는 정치성 간담회에 위기 대응에 여념이 없을 10대 기업 총수들과 경제 부처 장관들을 호출했다. 그러곤 이들이 대통령과 어울려 떡볶이를 먹으며 환히 웃는 장면을 연출했다. 밖에서는 냉전을 언급하며 초비상이고 안에서는 서민들이 아우성인 때다. 변화도 위기도 모르는 리더십만 홍보한 격이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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