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정의 사이에서… 잊을 수 없는 소시민, 펄롱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다산책방, 132쪽, 1만3800원
아일랜드 출신 소설가 클레어 키건(55)의 2021년작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번역돼 나왔다. 2022년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1985년 아일랜드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석탄·목재상을 하는 펄롱이라는 인물을 통해 소시민의 불안한 삶을 그려내면서 가족과 정의 사이의 윤리적 고민을 묘사했다.
키건은 다수의 문학상을 받으며 영미문학에서는 이미 거장으로 불려왔지만 국내에는 올해 처음 소개됐다. 2009년 발표한 그의 세 번째 소설 ‘맡겨진 소녀’가 지난 4월 출간돼 호평을 받았다. ‘소설가 50인이 뽑은 2023년 올해의 소설’ 조사에서 해외 작가 작품으로는 최다 추천을 받았다.
키건은 문장을 매우 절제하는 작가다. 1999년 첫 책으로 단편집 ‘남극’을 발표한 후 지금까지 네 권의 책만 냈는데, 모든 책이 얇다. 11년 만의 신작인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본문이 110쪽에 불과하다. 이 소설은 역대 부커상 후보작 중 가장 짧은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키건은 짧은 분량에서도 메시지를 분명하게 말하지 않고 암시한다. 번역자 홍한별은 “말할 듯 말 듯 조심스레 이야기한다”고 표현했다. 짧고 암시적인 키건의 소설은 ‘두 번 읽기’라는 그의 독특한 읽기 방식과도 연결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키건은 번역자에게 보낸 메일에서 “소설가 존 맥가헌은 좋은 글은 전부 암시이고 나쁜 글은 전부 진술이라고 말하곤 했다”라며 “저는 두 번 읽어서 결말 부분이 앞으로 밀려와 다시 서사가 한 바퀴 돌아가기 전에는 이야기를 다 읽었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수녀원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 사건을 다룬다. 아일랜드 카톨릭교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정부 지원 하에 여러 개의 여성 수용 시설을 운영했는데 여기서 은폐, 감금, 강제노역을 당한 여성과 아이가 1만명에서 3만명에 이른다.
소설은 수녀원의 인권 유린 실상을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다. 한겨울에 맨발로 감금된 10대 소녀를 슬쩍 보여줄 뿐이다. 소설이 길게 묘사하는 것은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이 소녀를 보게 된 펄롱의 삶이다. 그는 아버지도 모른 채 태어났고 한 노부인의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성실한 노동으로 자기 가정을 일궜지만 추락에 대한 불안감을 지니고 산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소설은 펄롱을 통해 소시민의 삶과 노동, 불안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그런 펄롱에게 수녀원의 헐벗은 소녀가 발견된다. 소시민의 윤리를 대표하는 아내는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고”라며 잊어버리라고 한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 그래야 계속 살지.” 상대는 거대한 교회다. 주민들은 대충 알면서도 모두 외면하고 있다.
그런데 펄롱은 그 소녀를 지워버릴 수 없다. 그 소녀에게서 맨발, 빈주먹으로 자라온 자신을 보기 때문이다. 또 미혼모로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본다. 모자를 집으로 받아들여준 노부인 미시즈 윌슨도 떠올린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수녀원)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펄롱은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밤거리를 헤맨다.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키건은 이 소설을 통해 크리스마스에 대한 잊히지 않을 장면을 만들어냈다. 크리스마스에 펄롱을 기다리는 건 가족만이 아니었다. 수녀원에 갇힌 맨발의 소녀도 있다. 펄롱은 가족과 소녀 사이에서, 침묵과 용기 사이에서, 안락과 추락 사이에서 위태롭게 걷는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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