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법시행 등 백성의 삶에 치중한 실학자 김육

김삼웅 2023. 12. 7.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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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35] 김육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조선왕조 500년 동안 정학(正學)이라 불리며 국교처럼 되었던 주자학과 성리학은 후기에 이르면서 본래의 정신과는 달리 허례허식에 빠져들었다. 선비나 관료들은 이를 알면서도 관행·타성에 젖어 헤어날 줄 몰랐다. 국가안위나 백성들의 생계는 소홀히 되고 공리공론으로 세월을 보내었다.

이와는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이 있었다.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고 수레와 수차(水車)를 도입하여 민생 곧 백성의 경제생활의 안정과 국가재정의 충실화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실천할 사람이다.

김육(金堉, 1580~1658)은 시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아버지 김흥우와 어머니 한양 조씨 사이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인 김식의 후손이며, 어머니는 조광조의 아우 조승조의 손녀이다. 명문가의 후손으로 출생한 것이다. 25살 때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김육의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본관은 청풍이다.

광해군이 즉위한 1609년 동료들과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등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렸다가,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하고 성균관을 떠나 경기도 가평 잠곡에 은거하였다.

처음에는 거처할 집이 없어 굴을 파고 헛가래를 얽어내고 살았다.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저녁에는 송진으로 불을 밝혀 책을 읽었다. 36세가 되어서 초가삼간을 짓고 회정당 (晦靜堂)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가난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아 남의 밭에 김을 매주고 숯을 구워 서울로 짊어지고 다니는 노역을 해야 하였다. 일화에 도성에 파루를 치면 가장 먼저 동대문으로 들어선 이가 바로 그였다 한다.(이종욱, <17세기 문화공간 - 남산 회현동 김육의 집>)

인조반정은 그에게 생의 전환기가 되었다. 44살에 관계에 나가 의금부도사에 이어 음성현감, 정언(正言), 안변도호부사, 형조참의 겸 대사성, 대제학, 대사간, 병조참의, 한성부윤, 병조참판, 이조참판, 형조판서, 예조판서, 도총부도통관 등 현직을 두루 거치고 사신으로 청국에 두 차례 다녀왔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대동법의 시행을 적극 추진했다. 충청도관찰사 재임 중에 이를 위해 중앙에 건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시행을 서둘렀다. 대동법이란 국가가 사용하는 물자를 공물의 형태로 직접 거두는 대신 쌀이나 옷감으로 통일하여 거두고 공인(貢人)에게 지급하여 국가가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게 하는 제도이다. 조세문제는 탐관오리들이 백성을 수탈함으로써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그동안 경기도와 강원도에서는 시행되었으나 충청·호남지방의 시행은 중지된 상태였다. 강력한 반발 때문이었다.

김육의 강인한 추진력에 힘입어 대동법은 마침내 1651년에는 충청도에, 1658년에는 전라도 연해의 읍에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대동법에 대한 저항이 가장 강한 충청·전라도에서 대동법의 실현은 그 전국적 확대를 위한 기틀을 닦았다. 김육이 아니었더라면, 효종대에는 충청·전라도에 대동법이 확대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후도 기약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헌창, <김육의 경제사상과 경제적 업적>)

그는 대동법 전국시행에 이어 행전(行錢, 동전)의 유통, 수차와 수레의 도입 건의 등 주로 민생에 도움이 되는 시책을 제기하였다. 뿐만 아니라 각종 서적을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고자 직접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하는 데에도 많은 역할을 하였다.

어느 시대나 개혁정치에는 반대 세력이 존재한다. 1650년 김육이 우의정을 사직하는 상소의 한 대목이다.

신은 몹시 고루하여 기모(奇謀)와 비책(秘策)을 알지는 못합니다. 오직 <서경>의 "서인을 보살펴 보호하라", <서경>의 "애처로운 이 외로운 자들이여", <논어>의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라", <맹자>의 "화합안한 것은 없다", <중용>의 "서민을 자식처럼 사랑하라", 및  <대학>의 "대중을 얻으면 나라를 얻는다"는 구절이 만세에 마땅히 행하여야 할 도(道) 라고 여겨, 세금을 고르게 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여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하고자 할 따름 입니다.(이헌창, 앞의 글)

그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잠곡유고>, <잠곡별고>, <잠곡속구> 외 다수가 있다. 남산 아래 재산루(在山樓)라는 정자를 짓고 살다가 79살에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재산루 앞 대에 올라>라는 작품이다.

지팡이 짚고 재산루에 가니
벼랑을 타고 작은 대에 올랐다
성긴 숲은 소나기가 그쳐 있는 데
깊은 골짜기에는 가벼운 우레 흩어지네
꽃길은 원래 대숲에 이어져 있는데
넝쿨 옷은 이끼에 물들여 하네
시원하여 즐기는 마음 족하니
해가 기울어도 돌아갈 줄 모른다네.(<잠곡유고>)

김육은 오늘날 정치가나 관료가 귀감으로 삼아도 좋을 인물이다. 그는 도덕적으로 자신을 수양한 다음 인민과 나라에 이로운 정치 이념을 발전시키고 정책으로 구현하여,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줄기차게 추진하였다.

그는 남과 외국으로부터 열심히 배우고 기존의 좋은 정책을 발굴하여 추진하였으며, 새로운 정책의 창안에 급급하지 않았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면, 이해 당사자의 입장이 반영된 반대 여론에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파당적 이해나 자리의 보존을 추구하지 않고 정책의 구현에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걸었다.(이헌창, 앞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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