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기의 시시각각] 100세 키신저, 97세 와타나베

김현기 입력 2023. 12. 7. 00:52 수정 2023. 12. 7.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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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민하고, 되묻고, 반대를 살펴라
노장의 시대는 가도 정신은 불변
우린 언제까지 김칫국만 마실 건가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1 지난주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키신저 하면 생각나는 게 1972년 11월 '전설의 인터뷰어' 팔라치와의 인터뷰다. 팔라치와의 첫 만남에서 키신저 당시 국무장관은 시종 딴짓을 했다. 그리고 이틀 뒤 다시 오라 했다. 팔라치는 꾹 참았다. 이틀 뒤에도 키신저는 인터뷰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이제 캘리포니아로 떠나야 한다"며 인터뷰를 끝내려 했다. 이때 팔라지가 불쑥 물었다. "근데, 박사님이 (닉슨) 대통령보다 더 유명하고 인기가 높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키신저의 허를 찌른, 핵심적 질문이었다.

미국 국무장관 시절의 키신저


순간 긴장이 풀렸던 키신저는 이렇게 답했다. "난 항상 혼자서 행동한다. 미국인들은 말 타고 혼자 맨 앞에 선 카우보이를 좋아한다.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곳에 있는 것, 그게 카우보이다." 인터뷰가 나가자 키신저에겐 "너 혼자 카우보이고 영웅이냐"란 비난이 쏟아졌다. 키신저는 나중에 "영향력을 강조하고픈 허영심 때문에 그랬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키신저의 스타일은 이즈음부터 확 바뀌었다. "친구를 가까이하라. 적은 더 가까히 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참모들에겐 늘 자신과 다른 의견을 되물었다. 나치의 유대인 박해에 항거해 미국으로 건너온 키신저나 나치 점령하 그리스인들이 펠로폰네소스 언덕에 새긴 그리스어 '아니오'의 정신을 평생 추구했다는 언론인 팔라치의 저항 정신이나 그 맥은 통해 있다고 본다. 고민하라, 되물어라, 반대를 살펴라.


와타나베의 쓴소리


#2 세계 최대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일본 요미우리 신문의 와타나베 쓰네오 주필은 97세다. 현재 도쿄의과치과대에 입원 중이지만 그는 매일같이 회장(주필 대행), 사장으로부터 다음 날 나갈 사설을 보고받는다고 한다. 한·일 간 주요 고비마다 막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와타나베의 비화 한 토막을 최근 주변 인사로부터 접했다. 전후 70주년을 맞은 2015년 8월 일본 정부의 '아베 담화'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다.

요미우리는 보수적 색채가 강한 신문이지만 침략 전쟁에 대해선 단호했다. 아베 담화가 나오기 두 달 전쯤 아베 총리는 비밀리에 와타나베를 찾았다. 그리고 '담화 초안'을 내밀었다. 와타나베 주필의 반응은 이랬다고 한다. "(무라야마 담화에 있는) '침략' '식민지 지배' '통절한 반성' '오와비(사죄)'의 네 단어가 빠져 있지 않은가. 이건 안 된다. 일본의 침략전쟁은 성전(聖戰)이 아니라 살육이었다. 자네는 할아버지(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가 A급 전범) 때문에 그런 모양인데, 난 직접 이등병으로 전쟁터에 나가서 잘 안다. 이 키워드 4개를 빼면 요미우리는 '아베 내각 도각(倒閣·무너뜨리기) 운동'에 나설 것이다."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신문사 주필


아베가 왜 굳이 와타나베를 찾아 반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와타나베는 왜 굳이 주변의 만류를 무릅쓰고 권력자에게 쓴소리를 굽히지 않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와타나베의 충언은 반영이 됐다. 주어와 술어를 애매하게 처리했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새롭게 회오'(悔悟·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함)란 단어도 들어갔다.


대통령, 대통령 참모들이 새겨야 할 것


#3 100세 전후의 노장들 시대와 2023년은 물론 다르다. 이젠 그런 거물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를 관통하는 가르침은 분명 있다. 지도자의 입맛에 맞는 말과 보고만 난무하면 결국 지도자의 오판과 실정, 국가와 국민의 피해로 이어진다는 진리다. 키신저와 팔라치도, 아베와 와타나베도 그걸 알았을 것이다. 우리도 이번 엑스포 참패에서 그걸 목격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를 비롯한 엑스포 유치 대표단이 지난달 28일 오후(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남부 외곽의 '르 팔레 데 콩그레 디시'에서 2030 세계 엑스포 개최지 선정 투표 결과 큰 표차로 탈락하자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뉴스1


거슬러 올라가면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때도 그랬다. 대다수 외신, 그리고 현장에선 결과를 비관했다. 하지만 우리만 결렬 26분 전까지 낙관하고 김칫국을 마셨다. 웃음거리가 됐다. 상황을 냉정하게 전달하는 '레드팀'이 작동하지 못한 결과였다. 다시 돌아가 키신저와 인터뷰했던 팔라치의 말을 되새겨본다.
"살다 보면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잘못이 될 때가 있다."

김현기 순회특파원 겸 도쿄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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