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경험 거의 없는 대통령이 또... 붕괴의 징조인가 [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임상훈 2023. 12. 6.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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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훈의 글로벌리포트] 전 세계적 반체제 극단주의 세력의 확장

[임상훈 기자]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자가 지난 11월 19일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뒤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아르헨티나 대선 결과는 현시대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정치 불안정성에 대한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예시로 기록됐다. 아시아, 유럽, 미주 가릴 것 없이 지구촌 곳곳의 민주주의 전통을 비교적 오래 가진 나라들이 겪는 '시스템 이상 징후'의 연장이다. 구체적 발현 방식은 조금씩 달라도 근본적 패턴이 반복적으로 읽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정상과학'이 어떻게 변화를 맞고 진화가 이뤄지는지 밝혀낸 바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책은 과학의 본질을 말하기보다 의도치 않게 모든 사회적 시스템의 변화 과정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결과가 됐다. 과학 담론이 모든 사회 구조 패러다임의 패턴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

'정상체제'가 굳건할 때는 그 안의 이상 징후들이 작은 해프닝으로 간주되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사라진다. 하지만 정상체제가 낡고 현실 대응에 무디어질 때, 이상 징후들은 균열을 더 크게 만들고 정상체제를 위협한다. 그러다 정상체제가 더 이상 그 균열을 막지 못할 때, 구패러다임은 붕괴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 그렇게 사회는 진화한다.

'정상체제'의 균열... 극단주의의 등장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
ⓒ 연합뉴스
 
20세기 이래 대부분의 전통적 민주국가에서는 두 세력 간의 경쟁과 보완으로 정치체제가 구성돼 왔다. 하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그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 혁명을 주창한 공산주의 이념을 수정·보완하면서 정착한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민주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수정주의라는 오명을 얻으면서 소수파로 시작했지만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서구 국가들에서 이내 공산주의를 밀어내고 진보 세력의 중심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때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세력과, 때로는 녹색당 등 새로운 진보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과 연대하면서 복지 이념을 정상체제화하는 데 결정적 공헌을 했다.

두 번째 이념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의 힘이 급속하게 성장하면서 발생하는 심각한 사회적 모순에 대한 공동체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효용은 다수의 이익과 함께 유지되고 상승한다는 깨달음이 경제 원리에도 적용되고, 모든 것의 상품화를 통한 객관적 가치화가 공리적 이득으로 연결된다고 이들은 본다.

국가의 당위성은 효용의 극대화를 위한 목적이어야 하며 이를 위해 기획 조정 기관으로서의 국가 공권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거칠게 단순화시킬 위험이 있지만 진보적 가치가 의무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면, 이러한 보수적 가치는 목적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외계층을 공리적 가치에 희생시킨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인류가 가진 부의 총량을 증가시키는 데 시장경제주의는 큰 공헌을 했다.

이렇게 수십 년 이어져 온 양축으로 이뤄진 정상체제는 20세기 말에 이르러 근본적인 균열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그에 따라 재화와 자원의 한계가 드러나고 있다. 복지는 한계점을 향하고, 무분별한 개발은 심각한 환경 문제를 양산했다. 디지털 자원의 무한성과 정보혁명은 모두에게 무제한적 분배를 보장하리라 믿었지만 오히려 인간으로부터 노동 주체의 지위마저 서서히 박탈해 가고 있다. 

이런 위기의식 속에서 균열을 보완하리라 기대했던 정상체제는 무기력함만 드러내고 있다. 형식적 차원의 정상체제는 늘 작동하는 듯 보인다. 선거를 통한 민주적 좌우 정권교체 시스템은 보장되고 있다. 하지만 그 형식적 틀이 제공해야 할 실질적 변화는 유권자들이 거의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좌우 어느 쪽도 균열을 메우는데 역부족이라는 것만 확인해 줄 뿐이다.

이런 속에서 표출되는 체제에 대한 불신은 전방위적이다. 젊은 세대는 더 이상 기성세대가 만든 체제에 신뢰를 주지 않고 있다. 인류 역사상 늘 체제의 중심에서 소외돼 있던 여성들의 권리 요구는 역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남성들로부터 매도되고 있다. 심각한 경제난과 환경위기를 피해 이주하는 저개발 국가 출신 이주민들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이유로 인권적 모욕을 당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회적 균열이 부른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찾아오는 공포와 비관에서 비롯되고 있다. 미래에 대한 공포와 비관은 과거를 미화시킨다. 도전보다는 회피를, 대화보다는 은둔을, 연대보다는 배척을 지향한다. 체제에 대한 불신은 구성원 상호 간 혐오로 나타난다. 비판적 적극주의보다 맹신적 소극주의가 사고를 지배한다.

극단주의는 이처럼 의무론적, 목적론적 윤리가 모두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 하지 않기 시작한 20세기 말 무대 위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서는 급기야 기존 체제를 위협하면서 하나 둘 정계를 잠식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많은 전통적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들 극단주의는 기존 정치세력을 붕괴시키면서 집권세력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가 흔들리고 있다
 
 PVV(자유당)의 게르트 빌더르스 대표가 지난 11월 22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총선 출구조사 결과가 나온 이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PVV는 '반이민' 'EU 탈퇴'등을 주장하는 극우성향 정당이다.
ⓒ 로이터/연합뉴스
 
20세기 초 극단주의의 큰 흐름이 극좌로 이어졌다면 21세기 초 이러한 동향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 대부분 극우사상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외가 프랑스다. 프랑스는 1973년 국민전선(Front national)이 창당된 후 현재 국민연합(Rassemblement national)에 이르기까지 극우세력이 꾸준히 성장해 왔다. 하지만 극우의 성장과 동시에 범국민적 반극우동맹은 모든 정치세력을 포괄해 암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선에 출마하는 국민연합의 후보가 국민 절반의 지지를 얻지 않는 이상 암묵적 반극우 동맹은 그 상대가 누가 됐든 그를 향해 표를 던진다. 오직 극우 대통령을 막기 위한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위한 마지노선인 것이다. 그렇다고 극단주의가 프랑스를 비껴간 것은 아니다. 그들의 방식으로 기존 체제를 비토(Veto)하는 프랑스식 극단주의가 있다.

2017년 바람같이 등장해 현재까지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에마뉘엘 마크롱이 그 주인공이다. 그의 등장과 함께 기존의 드골주의-사민주의 양당 체제는 완전히 붕괴됐다. 이러한 프랑스 특유의 '반체제' 극단주의를 정치학에서는 '극중주의'(Extrême centre)라고 부른다. 프랑스대혁명 직후 정치혐오에 빠진 프랑스인들이 기존 정치세력을 모두 거부하고 관료들의 국가 지배를 선호했던 역사에서 유래한다.

프랑스식 극중주의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민주국가에서 반체제적 극단주의는 극우로 수렴되고 있다. 그 정점은 물론 2017년 등장한 미국의 전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다. 에마뉘엘 마크롱과 도널드 트럼프의 정치 진영은 완전히 다르지만 반체제적 정치 혐오주의를 등에 업고 기존 정치권을 뒤흔든, 정치 이력과 경험이 거의 없는 정치 신예들이었다는 점은 동일하다.

이후 등장한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2019-2022), 지난달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승리한 하비에르 밀레이 역시 기존 정치 시스템의 무기력과 이를 향한 국민들의 혐오가 함께 빚어낸 반체제적 극단주의라는 점에서 트럼프, 마크롱과 동일하다. 물론 이들의 정치적 배경과 정치성향은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 같은 극우로 불리지만 트럼프와 밀레이의 경제관은 각각 보호무역과 자유무역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상반된다.

하지만 이들의 정치세계관을 관통하고 있는 반체제 극단주의의 특징은 놀랍게 유사하다. 이들의 지지세력은 공통적으로 남성, 백인, 기독교에서 결집도가 높다. 정치적으로 기존의 어느 정당도 거부한다는 점도 이들에 대한 열성 지지자들의 공통점이다. 환경 위기론에 대해서는 강한 불신, 심지어 음모론까지 가지고 있다.

그 밖에 현재 집권 중인 이탈리아의 이탈리아의형제들(FdI), 북부동맹(NL), 지난달 22일 치러진 총선에서 제1당으로 올라선 네덜란드의 자유당(PVV), 점차 지지율을 높여가는 스페인의 복스(Vox) 등 대부분의 극우세력에서 공통된 특징들이 반복해 등장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서 극우세력이 발흥하는 현상이 기존 정치 패러다임 붕괴의 전조일지 판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다만 정치에 대한 실망, 혐오가 커질수록 극단주의 세력의 발호는 필연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민주주의가 내용보다 형식에 매달릴수록 정상체제 붕괴의 날은 빨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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