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분노의 시대, 원한의 정치

천지우 입력 2023. 12. 6.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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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은 1945년 이후 세계 질서의 성패를 가르는 해가 될 것이다." 내년에 주목해야 할 10가지 트렌드를 정리한 영국 시사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에 나오는 표현이다.

그는 존중받지 못해 분노한 집단에 가해지는 부당한 행위들을 막는 노력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틀 속에 각 집단의 정체성을 동화시키는 것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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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 국제부장


“2024년은 1945년 이후 세계 질서의 성패를 가르는 해가 될 것이다.” 내년에 주목해야 할 10가지 트렌드를 정리한 영국 시사지 이코노미스트 최근호에 나오는 표현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글로벌 체제가 무너지느냐 마느냐가 내년에 달렸다는 얘기다. 왜 이렇게 벌써부터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혀 있는 걸까.

내년에는 42억명이 사는 70여 국가에서 선거가 실시된다고 한다. 역사상 가장 많은 선거가 치러지는 것이니 일견 민주주의의 축복일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이코노미스트의 근심이다. 많은 선거에서 자유를 제한하는 권위주의적 통치자, 부패하고 무능한 자들이 승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하는 근심은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이다.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대선 결과를 뒤집으려 했던 인물이 출마하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의 훼손이라면서 그의 재선은 전 세계에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신냉전의 무대가 된 한반도와 대만해협, 전쟁이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그러나 이 와중에 갈수록 취약해지는 서방 연대 등 2024년의 다른 주요 트렌드 역시 미국의 선택에 절대적으로 좌우된다. 이렇듯 가장 중요한 선거에서 누구보다 부적격한 사람이 두 번째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크다는 것,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미국의 트럼프뿐이 아니다. 여러 나라에서 유사 트럼프들이 나와 득세하고 있다. 도대체 왜 그런 걸까.

인도 출신 칼럼니스트 판카지 미슈라는 서구 엘리트들과 똑같은 과실을 얻게 해주겠다는 약속이 기만이었음을 깨달은 비서구 민중 및 서방국 하위계층의 분노와 원한, 시샘, 굴욕감, 무력감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설파했다. 미슈라의 책 제목 ‘분노의 시대: 현재의 역사’가 현 상황을 압축한다. 그는 에밀 졸라의 소설 ‘제르미날’의 한 대목을 인용해 “사회의 주인들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경고했다. 관심을 가지라고, 겉모습 뒤를 돌아보라고, 땀 흘려 일하면서도 고통받는 가엾은 사람들을 눈여겨보라고 경고했다. … 많은 나라가 역사상 가장 끔찍한 대재앙에 휘말릴 위험이 있다”고 밝혔다.

미슈라가 영미식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섣불리 선언했다가 낭패를 본 인물로 꼽은 프랜시스 후쿠야마 스탠퍼드대 교수(‘역사의 종말’ 저자)도 최근작 ‘존중받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자신의 오판을 시인했다. 후쿠야마는 “존엄에 대한 인정 요구는 오늘날 세계 정치에서 일어나는 많은 현상을 하나로 묶는 마스터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존엄성 인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사라지는 것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며 “인간 존엄성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이해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인류는 끊임없는 갈등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존중받지 못해 분노한 집단에 가해지는 부당한 행위들을 막는 노력과 함께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틀 속에 각 집단의 정체성을 동화시키는 것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미슈라는 ‘왜 그들이 우리를 증오하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했다. 그는 “채워지지 않는 허영심과 얄팍한 자기애를 달래는 문화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시 살펴봐야 한다. 온갖 형태로 벌어지는 일상의 폭력과 약탈에 우리 자신이 어떻게 연루돼 있고, 비참한 고통의 모습에 우리가 얼마나 냉담하고 무관심한지도 정직하게 되돌아봐야 한다”고 일갈했다. 맞다. 나의 안온함 속에 갇혀 타인의 처지에 냉담과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통절하게 반성해야 한다.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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