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마폭이 산맥이 된 회화… 가부장 사회를 조롱하다
한국의 산하는 굽이굽이 깊은 산이다. 조선시대 진경산수를 개척했던 화가 겸재 정선이 금강산 가는 길에 마주치는 바닷가 절벽을 그린 ‘옹천(독벼랑)’은 한국 산세의 상징 같은 풍경이다. 그런데 한국의 여성을 상징하는 한복 치마가 울룩불룩 일어나 그 진경산수화 옹천을 연상시키는 한국 산하, 굽이치는 산맥으로 변신했다. 이런 페미니즘적인 도상을 만들어낸 주인공은 작고한 여성 작가 정강자(1942∼2017)다. 그는 이 ‘한복치마 산맥’ 연작으로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가 은근히 자신에게 가했던 집단적 따돌림을 기세 좋게 덮어버리고 회화 작가로서 정체성을 당당히 자리매김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동안 행위예술가로 깊이 각인된 정강자를 회화 작가로 무대 위에 올리는 전시가 서울 종로구 아리리오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전시 제목은 ‘나를 부른 것은 원시였다’다. 시기적으로 1995년부터 2010년대까지를 망라한 40점이 나왔다. 작가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 작품 세계의 변천사를 제대로 짚기에 충분한 물량이다.
정강자의 회화는 지난 2018년 아라리오갤러리에서 타계 1주기를 맞아 열린 회고전을 통해 설치미술 작품과 함께 선보인 적이 있다. 이번 전시는 오롯이 회화 작품만 선보였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정강자는 1960∼70년대에 한국 미술계에서 청년 작가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된 전위적 실험미술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현재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실험미술 1960-1970년대’전에도 이건용 김구림 성능경 등 생존한 원로 작가들과 함께 초대 작가에 포함됐다.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정강자는 정찬승 강국진 등 당시 아방가르드 정신으로 뭉쳤던 동료 미술가들과 ‘청년작가연립전’(1967)을 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신전(新展)’ ‘제4집단’ 등 실험미술 그룹에 참여하며 한국 현대미술의 초기 퍼포먼스를 이끌었다.
그런데 정강자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방식은 최초의 누드 퍼포먼스의 주인공으로서다. 사연은 이랬다. 1968년 5월 30일 서울 중구 세시봉 음악감상실. 그가 정찬승 등과 기획한 ‘투명 풍선과 누드’ 퍼포먼스가 예정돼 있었다.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의 누드 배제, 여성의 육체를 욕망하고 타자화 하는 가부장적 남성의 시각을 고발하기 위해 여성의 몸에 투명 풍선을 불어서 붙이고 다시 터트리는 퍼포먼스다. 그런데 섭외한 모델이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참여작가들 중 유일한 여성인 정강자가 직접 퍼포먼스를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6세였다. 미니스커트조차 규제됐던 시대에 누드 퍼포먼스를 벌인 정강자에게 가해진 세상의 시선은 야릇했다.
정강자는 70년에는 한강변에서 펼쳤던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 퍼포먼스에도 참가했다. 문화예술계의 체제 순응을 비판한 행사다. 그해 열린 자신의 첫 개인전 ‘무체전’(1970)은 사회비판적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강제 철거됐다. 이런 전위성에도 불구하고 정강자는 ‘키스 미’(1967) ‘휴지 의상’(1969) 등 선정적인 설치 작품, 행위예술의 이미지만 세간에 기억됐다.
뚜렷한 성취를 내지 못하던 정강자는 결혼과 함께 77년 싱가포르로 이주했다. 82년 귀국했지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정강자는 다시 일어섰다. 해외여행을 통해서다. 해외여행이 쉽지 않았던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작가는 중남미와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남태평양 등을 찾아 2∼3개월씩 홀로 여행하며 이국적인 풍경과 인물을 그렸다. 회화 작가로 새로운 작가 인생을 개척한 것이다. 전시 제목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는 작가 인생의 변곡점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것으로 분석된다.
인간 본연의 삶을 찾으러 떠난 여행에서 그린 그림들은 풍물화에서 시작해 초현실적, 환상적인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식으로 발전했다. 무성한 초록의 야자수 위에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뜨개질을 하고 그 실 끝에 거미가 매달려 있는 ‘거미’ 작품은 강렬한 원색의 대비, 비현실적인 이미지의 결합으로 신화적인 느낌마저 난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초현실성과 추상성이 강화된다. 작가는 작가의 분신이자 아이콘으로 여긴 야누스의 형상을 반복적으로 등장시켰다. 또 최소한의 이미지 단위로 반원을 사용해 반원을 벽돌처럼 축조하며 나무 등 자연뿐 아니라 남자와 여자 등 인물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했다. 정강자는 회화를 할 때 색을 섞지 않고 생색을 거의 그대로 쓴다. 색이 섞여서 만들어지는 중간색 톤이 이성 중심의 남성 사회를 상징하는 것에 대한 반기처럼 읽힌다.
가장 주목하고 싶은 것은 한복 치마의 등장이다. 정강자는 한복 치마를 재해석해 조형 요소로 활용하는데 이것이 자못 상징적이다. 여기서 한복 치마는 가부장 사회에 맞서며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도구로 쓰이는 것 같다. 이미 한국의 여성미술계는 한복 치마를 페미니즘 기치를 내걸기 위한 깃발처럼 사용한 바 있다. 정정엽 등 여성미술가 10인이 결성한 예술그룹 ‘입김’이 2000년 ‘아방궁 종묘점거 프로젝트’를 하며 한복 치마를 빨랫줄에 내건 것이 그 예다.
정강자의 회화에서도 한복 치마는 자신의 유년기 기억을 여러 이미지 요소로 표현하던 스페인의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호안 미로의 작품처럼 화면을 구성하는 이미지의 한 요소로 쓰였다. 훨훨 날아가는 이미지로 표현되며 가부장적 시선의 족쇄에서 해방 되고자 하는 내면의 심리를 표출했다. 여성 작가가 작업하기 쉽지 않았던 시대, 생계를 위해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작가에게 그림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 억눌린 욕망을 해소하는 수단이기도 했을 것이다. 날아가는 한복 치마는 그런 심리를 대변한다.
그런데 이미지의 한 요소로 쓰이던 한복 치마는 마침내 그 자체가 땅덩어리로 변신해 절벽으로 솟구치기도 하고 산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더 이상 한복 치마가 아닌 한국의 산하 그 자체가 된 것이다. 가장 전형적인 한복 치마 색인 빨간색과 초록색이 절벽 끝에 옷깃과 옷고름이 휘날려 한복을 연상시킬 뿐이다. 산으로 변신한 한복 치마는 또 어떤가. 마치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을 연상시키듯 한복 치마의 12폭은 그 자체가 산의 능선과 계곡으로 변주되고, 흰색의 옷깃과 옷고름은 굽이굽이 이어지는 산길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산길에는 민초들이 길을 간다.
18세기 조선에서는 금강산 여행 붐이 일었고 그 여행은 남성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다. 한국의 가부장적인 화가를 표상하는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에서는 조선의 양반들이 시종을 앞세우고 말을 타며 편하게 유람을 갔다. 하지만 여성주의 화가의 표상이 된 정강자의 그림에서는 한복 치마가 금수강산처럼 치솟고, 굽이굽이 산길에서는 스스로 말이나 소를 몰고 걸어가는 서민들이 등장한다. 그렇게 정강자의 여성주의 회화는 계급적으로 평등한 사회를 지지하며 연대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전시는 12월 30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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