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랑]“죽음은 준비할 때에만 우리를 존엄하게 해줍니다”

김서희 기자 2023. 12. 5.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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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랑 인터뷰>
정현채 교수./사진=정현채 교수 제공
“죽음을 인지하고 직면해야 삶이 간결해집니다.”

‘죽음’이란 단어에는 왠지 모를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습니다. ‘비관적이다’ ‘고통스럽다’는 느낌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는 걸 기피하기도 하셨을 겁니다. 특히 암 환자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애쓰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죽음도 삶의 과정 속 하나입니다. 현재의 삶, 지금 이 ‘순간’을 보다 더 건강하고 윤택하게 살기 위해서는 오히려 죽음과 친근해져야 합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죽음에 대해 연구를 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정현채 명예교수입니다. 40년 가까이 의사로 일하면서 수많은 환자들을 고치고 죽음을 바라봤습니다. 생물학적 죽음은 그에게 익숙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이 오십을 바라보며 자신의 죽음에 대해 궁금해지고 두려워졌습니다. 죽음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그 궁금증과 두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국내 죽음학 최고 권위자인 정현채 교수가 암 경험자로서 암을 이겨낸 비결, 또 암을 치료하면서 죽음을 성찰한 방법에 대해 아미랑에서 자세히 들려드립니다.

죽음이 삶의 끝은 아니다
죽음학은 죽음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한편, 사후 세계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학문입니다. 죽음학에서는 ‘죽음은 소멸이 아닌, 다른 세계로 옮겨감’이라는 전제로 근사 체험 차례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대 인지과학연구소는 ‘윤회’나 ‘카르마’에 대한 자료를 3000건 이상을 모아 연구 중이며, 의학학술지 ‘랜싯’은 사망 판정을 받은 후 심폐소생술로 되살아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근사 체험에 대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연구를 하기 전까지만 해도 정현채 교수는 죽음을 소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통해 삶과 의식과 우주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크게 확장됐습니다. 과학자로서 살아온 정 교수의 삶에 부족했던 부분을 보완해주고 더 풍요롭게 해줬습니다.

죽음이 소멸이 아닌 옮겨감이라면, 어디로 가는 걸까요? 미국의 예언가로 명성을 날렸던 에드거 케이시의 ‘삶의 열 가지 해답’에 따르면, 영혼은 사라지지 않으며 각 영혼은 거듭되는 환생을 통해 진보와 퇴보를 거듭합니다. 죽음을 다른 영적 세계로의 이어짐으로 받아들이면, 존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된다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정현채 교수는 “죽음을 공부함으로써 이번 생을 의미 있게 살다가 아름답게 세상을 마무리하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며 “죽음학은 결국 ‘좋은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잘 사는 것이 잘 죽는 것이기도 합니다. 완화의료 전문의 아이라 바이오크는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으로 네 가지를 꼽았습니다. 사랑한다, 고맙다, 용서한다, 잘 지내라. 이러한 감정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게 좋은 죽음이자 아름다운 죽음이라고 여깁니다. 정 교수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아는 순간, 죽음을 앞둔 말기 암 환자들의 공포가 줄어들 것이고, 극단적 선택을 하려는 이들의 마음도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을 일깨워준 방광암 극복기
현재 68세인 정현채 교수가 암 진단을 받은 건 2018년 1월입니다. 평소와 다른 콜라 색깔의 짙은 소변을 본 정 교수는 바로 비뇨기계 암이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내시경 검사 결과, 방광암이었습니다. 치료는 곧장 시작됐습니다. 방광 안에 결핵균을 주입하는 면역요법 BCG 요법을 1주일 단위로 여섯 번 진행했습니다. 방광을 완전히 비운 상태에서 요도 카테터를 삽입해 BCG를 방광에 두 시간가량 머물게 한 뒤 소변으로 배출하는 방법입니다. 치료 효과가 없어 조직 검사를 시행해 보니, 방광뿐 아니라 방광 근육층까지 암이 퍼진 방광암 2기였습니다. 같은 해 6월, 정 교수는 종양 크기를 줄이기 위해 젬시타민, 시스플라틴 항암제 병용 요법을 4주 간격으로 두 번 받았습니다. 수술 전 종양 크기를 줄이기 위한 치료였습니다. 그 후, 방광과 전립선을 다 들어내며 인공 방광 수술을 받았습니다.

2023년 8월, 방광암 완치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매년 1회씩 정기적인 추적검사를 하고 있으며 다행히 재발이나 전이 없이 건강한 상태입니다.

지난달 22일, 제주에 있는 정현채 교수와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사진=헬스조선DB
암과 이별하는 5년의 시간 동안, 그리고 그 이후 달라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해, 문답 형식으로 풀어봅니다.

-은퇴 후 제주에서 지내신다고.
“2016년 초부터 제주도와 서울을 오가며 지냈습니다. 나무로 지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아내의 소망이 계기였습니다. 암 치료를 끝내고 난 뒤에는 은퇴하고, 2018년부터 제주에 상주하고 있습니다. 물론 강의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종종 서울에 가기도 합니다. 다양한 묘목 130그루를 심으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화나무가 참 사랑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정원을 가꾸고 바다를 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루 일과가 어떤지?
“제 하루는 매일 오전 다섯 시 반에 시작합니다. 아침에 샤워하면서 제 자신이 누리는 ‘기적’을 상기하고 감사해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저의 신체가 멀쩡한 데 대한 감사, 오늘도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 변화하는 날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방광암에 걸리고도 잘 치료된 것에 감사하고, 소변주머니를 안 차고 사는 것에도 감사를 느낍니다. 그 후에는 제가 운영하는 ‘죽음학 카페’에 글을 올립니다. 죽음이나 인생 문제를 놓고 회원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대화를 나누곤 합니다. 아침 식사하고는 한두 시간 정도 걷습니다. 집 앞 인근 숲을 걸으면서 제자가 선물해준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며 자연을 만끽합니다. 버섯 사진만 9000장 넘게 찍었습니다. 제주 살이 장점 중 하나이지요. 오후에는 죽음 강의를 준비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암 환자로서 사회생활 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암 경험자로 죽음에 대해 강의하며 삶의 진정한 의미를 느낍니다. 부모를 여읜 중학생부터 60~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를 대상으로 죽음에 대해 강의합니다. 그러다보면 모두가 자연스레 건강의 소중함은 물론 삶의 귀함을 깨닫습니다. 17년째 죽음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데요. 그 시간 동안 성숙해진 대중들의 인식에 감사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강의 초창기만 하더라도, ‘재수 없는 이야기다’ ‘장의사가 되려고 하느냐’는 등의 비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는 저로 인해 많은 분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이 점차 바뀌는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암을 겪었더라도 사회에 복귀한 점에 대해 뿌듯함을 느끼는 때입니다. 제가 살아가는 날 동안 보다 많은 분들에게 강의하기 위해 평소에 운동을 꾸준히 하면서 제 건강에도 많이 신경 쓰고 있습니다.”

-암 진단 당시 심정이 어떠셨는지?

“매일 질병을 치료하는 교수인 저에게도 암은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암이 아닌 염증으로 인한 혈뇨이길 바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기도 했습니다. 암은 제가 아닌 남의 이야기인줄로만 알았습니다. 10년째 매일 아침 수영하고 2년마다 건강검진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건강을 관리해 왔습니다. 부모님 모두 급성심장질환으로 돌아가시고 형님도 과거에 대동맥 박리로 응급수술을 받은 집안 내력이 있는 만큼, 제가 아프게 된다면 그건 아마 급성심장질환 때문일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암이라니, 절망적이었지요. 돌이켜보니, 빠듯한 진료 시간으로 소변을 참는 습관이 방광암의 원인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힘든 순간은?
“암 투병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인공 방광 수술로 인한 육체적 통증이었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서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고집 부릴 걸’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습니다. 수술로 인한 회음부 통증은 병원에서 처방해준 펜타닐 진통제로도 견디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펜타닐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로 통증이 심해 데메롤 주사를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런 힘든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19세기 영국 시인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의 시 ‘굴하지 않는다―인빅투스’의 구절 덕분입니다. 12세 때 결핵에 걸려 왼쪽 다리 무릎을 아래를 절단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영국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헨리의 시 중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다, 굴하지 않는 영혼을 주셨음을 신에게 감사하노라’라는 내용을 떠올리며 살아있음에 감사했습니다. 가족들의 힘도 보태졌습니다. 수술 후 입원 5주 동안, 아내는 매 순간 제 곁을 지키며 매일 건강해질 수 있다고 끊임없이 격려하고 말동무가 되어줬습니다,”

-이후 심경의 변화는?
“60년 넘게 건강하게 살아봤으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암에 걸렸다고 원망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가족을 못 알아보는 치매나 교통사고가 아닌, 치료를 받으면 이겨낼 수 있는 암에 걸려서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암 경험자라고 위축되기는커녕, 암 이후로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암을 극복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왔습니다. 다른 암 환자들도 그렇듯이, 저 역시 수십 년 정신없이 살아왔습니다. 암 환자가 된 이후 처음으로 ‘나는 누구인가’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삶에 더 충실해진 것이지요. 문득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모두 봐야 전체의 모양을 알 수 있듯이, 제대로 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반대편인 죽음을 직시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때 아내가 선물해준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박사의 ‘사후생’이라는 책을 읽으며 과학자의 시각으로 죽음을 바라보고 싶어졌습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닌 ‘옮겨감’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으며 소화기내과 의사로 환자를 돌보면서 죽음학에 대해 연구와 강의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 없는가’란 책도 출간했습니다. 암 진단을 받으면서 죽음관이 더 명료해진 것이죠.”

-죽음이란 무엇인가요?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입니다. 결혼이나 취업처럼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사건입니다. ​죽음은 생각하면 염세적이고 비관해진다고 오해합니다만 죽음을 자꾸 생각할수록 오히려 현재 삶에 충실하게 됩니다. 삶의 끝이 아닌, ‘순환’이라는 점에서 죽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세요. 삶을 제대로 직시하기 위해 꼭 생각하고 깨달아야 할 게 죽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죽음은 준비할 때에만 나를 존엄하게 해줍니다. 삶의 길이를 무의미하게 연장하기보다 남은 삶을 꽉 채우고 잘 마무리해야 합니다.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을 맞아야 합니다. 저는 이를 위해, 제 신변을 미리 정리하고 있습니다. 연구실 비품이나 자료를 학교 의학역사문화원에 기증하고 있습니다. 장기기증 서약서와 유언장, 연명치료를 거부한다는 사전여명의료의향서, 묘비명도 작성해뒀습니다. 제 장례식에 쓸 음악은 물론 무명 수의도 준비했습니다. 제 삶을 제가 꾸려왔듯이 제 죽음도 제가 꾸리는 것이죠. 죽음을 이렇게 준비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분들에게 한마디.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신 사실입니다.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죽음을 언급하는 건 터부시합니다. 죽음에 대한 이런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죽음을 끔찍한 끝이 아닌 다른 세상으로 가는 ‘문’으로 받아들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집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평소 죽음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면 삶의 선택지가 간결해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줄어들 것입니다. 가까운 사람과 먼저 죽음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세요. 자기 자신과, 아내와, 친구와, 자식들과 죽음에 대해 얘기하고 함께 준비해보는 문화가 생겨나면 좋겠습니다.”

-지금 암과 싸우고 계신 분들께 한마디.
“두려움을 떨쳐내세요. 누구나 걸릴 수 있는 암입니다. 암에 걸렸다고 무서워할 필요도, 좌절할 필요도 없습니다. 불안함은 오히려 암 치료를 방해하고 여러분의 삶을 끌어내립니다. 치료를 충실히 받으세요. 그러면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휘둘리지 마세요. 나 자신과 담당 의사만 믿어야 합니다. 암에 걸려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드시겠지만 나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열심히 밥 잘 먹고 치료를 잘 받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혹여 말기 암이라 할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기보다는 ‘기회’라고 여기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통사고나 치매로 작별의 시간 없이 세상을 떠나기보다 자신의 마지막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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