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리랑' 제작한 애국자 나운규

김삼웅 입력 2023. 12. 5.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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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영화 <아리랑> 은 우리 영화의 출발점이오 가능성이며 현재성이자 미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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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33] 나운규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 시기에 국내외에서 많은 분들이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라를 찾고자 헌신하였다. 영화계에서도 나섰다. 대표적 인물이 춘사(春史) 나운규(羅雲奎, 1902~1936)이다.

서른 여섯 살의 짧은 생애였지만, 그의 '영화같은 삶'은 당대는 물론 현대인들에게도 일회성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배우를 광대 취급하며 하대하던 시절, 더욱이 민족적인 정서가 설 땅을 잃어가던 시대에 그는 도전에 나섰고 그리고 마침내 해냈다. 영화 <아리랑>은 우리 영화의 출발점이오 가능성이며 현재성이자 미래상이다.

"<아리랑>을 촬영할 때에 나 자신은 전신이 열에 끓어오르던 것을 기억합니다. 이 작품이 세상에 나아가 돈이 되거나 말거나 세상 사람이 좋다거나 말다거나 그러한 불순한 생각 터럭 끝만치라도 없이 오직 내 정신과 역량을 다하여서 나 자신이 자랑거리가 될 만한 작품을 만들자는 순정이 가득하였을 뿐이외다."(조희문, <나운규>)

먼저 나운규는 누구인가, 연보를 통해 알아본다.
 
나운규 연보
1902년(1세)    10월 27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약종상 나형권의 6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남
1917년(16세)    조정옥과 결혼
1918년(17세)    간도(명동중학교) 입학. 장남 종익 출생
1919년(18세)
     3.1운동 당시 회령 만세사건 주동자로 활동. 일본 경찰의 수배를 피해 만주를
거쳐 러시아로 피신
1920년(19세)
     딸 신자 출생. 간도로 돌아와 독립군 비밀조직 도판부 가입. 서울(중동학교) 입학
1921년(20세)
 
     중동학교 재학 중 도판부사건 혐의자로 체포됨. 보안법 및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 수감됨(3월 5일). 감옥에서 독립투사 이춘식으로부터 춘사(春史)라는 호를 얻음
1923년(22세)    만기출소(3월 5일) 후 회령으로 돌아옴. 극단 예림회에 가입(12월)
1924년(23세)    안종화의 소개로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연구생 배우로 입사
1925년(24세)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제2회 <운영전>에 단역으로 출연. 영화에 데뷔함
<심청전>(윤백남프로덕션)에 심봉사 역으로 출연
1926년(25세)
 
     <장한몽>(계림영화협회)에 출연. 촬영 도중 화재사고로 부상(2월). 조선키네마 프로덕션에 입사. <농중조>에 출연. 대중적 인기를 얻음. <아리랑>의
원작ㆍ감독·각본·주연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음. <풍운아> 각색·감독·주연
1927년(26세)
 
 
 
     <아리랑>·<풍운아> 가지고 고향에 감. <야서>(들쥐)원작·각색·주연 윤봉춘이 이 영화로 배우활동을 시작함. <흑과 백>(김택유영화사)에 조연
<금붕어> 각색·감독·주연, 조선키네마프로덕션 탈퇴
나운규가 중심이 된 나운규프로덕션 설립. 제1회 작으로 <잘 있거라> 제작
(원작·각색·감독·주연)
1928년(27세)    <옥녀> 제작. <사랑을 찾아서> 제작. <사나이> 제작
1929년(28세)    <벙어리 삼룡> 제작. 나운규프로덕션 해산
1930년(29세)
     '찬영회' 사건에 연루됨. <아리랑 후편>(원방각사) 주연. <정인도>(원방각사)
주연미나도좌 연극부에서 연극 공연
1931년(30세)    <금강산>(도야마프로덕션)주연.\ <남편은 경비대로>(도야마프로덕션) 출연
1932년(31세)    <개화당 이문>(원방각사) 감독·주연. <임자없는 나룻배>(유신키네마) 주연
1933년(32세)    <종로>(대구영화촬영소) 주연
1934년(33세)
     극단 '형제회'(성원 일행)에 소속되어 지방순회 공연. <칠번통소사건>(조선 키네마사)주연·각본·감독
1935년(34세)    <무화과> 조선키네마사
1935년(35세)    <아리랑 제3편>(발싱) <오몽녀> 각색·감독·미발표 시나리오 <황무지> 집필
1936년(36세)    8월 9일 오전 1시 20분 세상을 떠남. 영화인장으로 영결식을 치름(앞의 책) 
1926년 10월 1일 서울의 단성사에서 무성영화 <아리랑>이 개봉되었다. 25살의 영화인 나운규가 각본·감독·주연의 1인 3역을 맡아 제작한 이 영화는 상영이 끝날 무렵 극장 안은 온통 눈물 바다가 되었고 관객 모두가 일어나 영화의 주제곡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관객 중에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나네.

청천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후략)

이 때 주제가 아리랑의 노랫말은 이후 민요 아리랑의 '정본'처럼 인식되고 국내외 한인 사회에서 길이길이 불리게 되었다. 영화 아리랑이 히트를 치고 이에 따라 민중들 사이에 민족의식이 나타나자 조선총독부는 1929년 12월 민요 아리랑 등을 금지곡으로 지정하고 탄압했다. 영화 아리랑의 재상영을 금지하고 필름을 빼앗아갔다. 해방 후 영화 아리랑 필림을 찾고자 여러 사람이 나섰으나 아직 찾지 못한 상태다.

영화 아리랑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키며 상영될 즈음 한국사회는 몇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고 있었다. 그해(1926년) 3월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사립고등보통학교에 지리·역사 등의 과목에 일본인 교사를 채용토록 지시하고, 4월 순종이 사망했으며, 6월에 6.10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7월 총독부 학무국이 사립학교 교장들을 소환하여 6.10 만세운동에 참가한 학생들의 처벌을 명령했다.

8월 극작가 김우진과 성악가 윤심덕이 현해탄에 투신, 동반자살하고, 12월 의열단원 나석주가 동양척식회사 등을 폭파했다. 그리고 이 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게재한 <개벽>이 폐간당하는 등 탄압과 저항의 대척지점에서 아리랑 영화가 상영된 것이다.

"엄혹했던 시기 나운규의 영화가 어떻게 총독부 검열을 통과했을까.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주인공 '영진'을 미치광이로 만들었기 때문에 검열에 통과된 것이다. 일제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언술의 가사는 통과될 리 없었다.(…) 겉으로는 남녀간의 단순한 사랑노래로 만들고 그 뒤안길과 밑바탕에는 조국애의 씨를 심어놓은 것이다. 일제치하 조선대중음악사의 저항적 형극적 족적이 찾아진다."(박민일, <아리랑 정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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