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전용대 (1) 유년기 병약했던 삶 지탱해 온 힘은 셋째 누나의 기도

최기영 2023. 12. 5.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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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둘만 낳아도 '다자녀 가정'이란 이름으로 복지 혜택을 받는 시대다.

하지만 내가 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던 시절은 달랐다.

내 신앙고백의 첫 줄은 늘 셋째 누나로 시작한다.

아버지 몰래 목소리를 낮춰 내게 읊조려주던 누나의 성경책 읽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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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있어도 예배 꼭 참석하는 누나
늘 몸이 약했던 날 위해 치료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에 이끌려 교회 나가게 돼
12남매 중 10번째로 태어난 전용대 목사에게 고달팠던 유년은 자신을 주의 종으로 써 달라는 누나의 기도가 가슴에 새겨지게 한 시절이자 찬양하는 종으로 살게 한 동력이었다.


아이 둘만 낳아도 ‘다자녀 가정’이란 이름으로 복지 혜택을 받는 시대다. 하지만 내가 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던 시절은 달랐다. 5남 7녀. 축구팀을 꾸리고도 1명이 남는 12남매 가정. 그중 나는 열 번째 번호표를 달고 태어났다.

사실 우리 집은 12남매가 아니라 15남매 가정이었다. 부모님은 내 위로 세 명의 자녀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나 역시 태어나자마자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만큼 건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생후 7년 만에 비로소 내 이름을 호적에 올려야 했던 이유다.

많은 형제 중에서도 내 마음을 울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셋째 누나다. 내 신앙고백의 첫 줄은 늘 셋째 누나로 시작한다. 어렸을 적엔 지금처럼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불교나 유교 집안이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동네 유지였던 우리 집은 유교가 뿌리 깊게 내린 집안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교회 나가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그런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셋째 누나다. 나는 주일마다 누나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교회에 다녀온 날이면 우리는 아버지께 심하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한 번은 아버지가 누나의 긴 머리를 잘라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누나는 예배를 빼먹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어머니가 매번 아버지께 혼나는 딸이 안타까워 신발을 감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나는 집에서 교회까지 먼 길을 맨발로 걸어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이 되면 온 동네가 칠흑같이 어두워지는 동네여서 빛이라고는 촛불과 호롱불이 전부였다. 누나는 매일 밤 그 호롱불 아래서 성경을 읽었다. 아버지 몰래 목소리를 낮춰 내게 읊조려주던 누나의 성경책 읽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어린 나에겐 누나가 믿는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이 있는 데도 누나는 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매번 혼이 나고 나는 늘 아픈 걸까.’ 그런데도 내가 누나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매일같이 나를 치료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는 누나를 봤기 때문이다. 누나는 울면서 기도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눈먼 자의 눈도 뜨게 하신 하나님. 제발 우리 용대를 치료해 주세요. 그리고 주의 종으로 써 주세요.”

교회 출석엔 교회에서 주는 선물도 한몫했다. 당시 교회에서는 매주 빠지지 않고 출석하거나 전도를 많이 하면 성탄절이나 연말에 시상식을 해서 학용품을 주곤 했다. 흰 종이 구하는 게 어렵던 시절이었으니 공책과 연필 세트는 최고의 상품이었다. 하지만 이런 교회 생활도 중학생이 되면서 끝났다.

내 건강 상태는 더 안 좋아졌고 툭하면 쓰러졌다. 부모님은 결국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처음엔 의사 선생님 말씀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태는 더 나빠졌다. 몸은 더 아프고 다리는 심하게 절었다. 결국 나는 하나님을 부인하며 교회를 떠나버렸다.

약력=1960년 출생, 대표 찬양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낮엔 해처럼’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여 이 죄인이’, 한국복음성가협회 전 회장,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이사, 넓은들교회 협동목사, 한국 밀알심장재단 홍보대사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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