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욱의 시시각각] MB의 낡은 가방…중도의 실종

서승욱 입력 2023. 12. 5. 00:51 수정 2023. 12. 5.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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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욱 정치디렉터

이명박 전 대통령(MB)의 베트남 방문을 지난 1일 사진 기사로 접했다. 눈을 잡아끈 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낡은 가죽 가방이었다. 청와대 출입 기자 시절 순방 때마다 봤던 가방이어서 저절로 눈이 갔다. 기업인으로 일했던 1980년대 이탈리아 총리에게서 받은 선물이란 얘기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윤석열 대통령 이상으로 MB도 재임 때엔 외교 분야에서 많은 점수를 땄다. 한·미 동맹 복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완성,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유치와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가 상징적 장면들이다. MB는 그때마다 색이 다 빠진 그 낡은 가방을 들었다. 전용기에서 검토할 자료를 직접 가방 속에 넣었다.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던 2011년 더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출장길에도 MB는 '표 분석 자료'를 그 가방에 챙겨갔다. 저서 『대통령의 시간』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1차 투표에서 48~64표를 얻을 것으로 봤다. 실제 얻은 표가 63표였으니 예측 실패로 대통령이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인 이번 엑스포 유치전과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일 오전 베트남 방문을 위해 인천국제공항 제1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연합뉴스]


MB시대 5년을 두고는 진영과 이념, 시각에 따라 호불호와 평가가 극단으로 엇갈린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일부러 꺼낸 건 그의 퇴임 후 심화된 대한민국 정치 제1의 폐악, 극한의 진영 대결 때문이다. MB는 중도와 실용을 발판으로 집권했다. 이념이 아니라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 등 서울시장 재임 때의 실적이 그의 무기였다. '중도 실용'을 외친 그는 보수 정당의 경선에서 '찐 보수'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눌렀다. 친박계 의원들에게 '장돌뱅이(상인을 낮춰 부르는 말) 출신'이라 불리는 수모 속에 거둔 기적 같은 승리였다. 두터운 중도 지지층에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집토끼 유권자까지 등에 업었으니 쪼그라든 진보 진영 후보와의 승부는 어차피 뻔했다. 530만 표 차의 압도적 승리는 당연한 결과였다.

「 중도파 기반으로 집권한 MB 이후
진영 대결 격화로 실용정치 몰락
4년 뒤도 비호감 대선 반복 우려

그런데 이제와 돌아보면 MB는 중도층을 발판으로 집권한 마지막 대통령이었다. 그 이후 리더들은 그렇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문재인 전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은 우든 좌든 어느 한쪽의 탄탄한 지지가 기반이었다. 그 사이에 낀 중도층은 매번 어려운 선택의 압박에 몰렸다. 그러니 51대 49였다. 좋든 싫든 집토끼를 먼저 잡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 토양은 점점 더 굳어졌다. 누구도 과감히 중도나 실용의 깃발을 들기 어렵다. 중도에 좌표를 찍어도 좌우 진영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기 일쑤다. 좁고 위태위태한 중도의 담벼락 위에서 버틸 재주가 없다.

다음 대선은 어떨까. 일단은 '또 아니올시다' 다. 야당은 '개딸'에게만 목을 맨다. 이재명 대표나 '조·추·송'(조국·추미애·송영길)으로 묶인 이들 모두 강경 지지층과 좌파 팬덤만 바라본다. 그런데 반대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차기 주자 지지율 1위라는 한동훈 법무부 장관부터가 그렇다. 총선 출마설이 확산되면서 '조선제일혀'라는 그의 입이 춤을 춘다. "이게 민주당이다. 멍청아"에 "운동권 경력 하나로 도덕적으로 우월한 척하며 정치를 수십 년간 후지게 했다”며 상대의 '혐오' 발언을 '혐오'로 되갚아주고 있다. 그의 언어에 보수 층의 속은 후련할지 모른다. 하지만 현직 법무장관 답지 않은 잦은 언론 노출, '집토끼 지향적'으로 느껴지는 독설 퍼포먼스에 피로감을 느끼는 중도층이 주변에 꽤 있다.

'최악의 비호감 맞대결'로 중도층의 선택지를 좁혔던 지난 대선의 양상이 4년 뒤에도 되풀이될까 벌써부터 우려가 앞선다. 왕년엔 중도를 지향했지만 집토끼를 의식해 노선을 갈아타려는 듯한 이들까지 보인다. 실용의 영건들로 이름깨나 날렸던 정치인들이여, 낮은 여론조사 지지율에 기죽지 마시고, 좌우 눈치보며 기웃대지 마시고 왔던 길을 쭉 가시길 바란다. 그래야 양 극단으로 찢겨 싸우는 진흙탕이 조금이라도 정화되지 않겠나.

서승욱 정치디렉터 sswo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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