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이 묻다, 쿠데타란 무엇인가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입력 2023. 12. 5. 00:48 수정 2023. 12. 5. 09:0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979년 12·12와 한국 정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성수 감독의 영화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난 군사 반란을 다룬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이후 계엄 상황에서, 전두환이 이끄는 세력이 계엄사령관을 연행하고, 마침내 대통령의 사후 재가를 얻어냄으로써 실질적으로 대한민국의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 숨 막히는 과정을 그린 영화 ‘서울의 봄’은 실화에 기반하긴 했어도 실제가 아니라 극적 재현(representation)이다. 그래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서울의 봄’은 12·12를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된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12·12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영화의 힘을 빌려 이 질문에 답해보자. 영화 속에서 전두광(실제에서 전두환)은 말한다.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즉 거사가 실패하면 12·12는 반역이 되고, 성공하면 혁명이 된다. 거사를 멋지게 성공시키고 싶은 전두광은 가능하면 혁명이란 말을 쓰고 싶어한다. “이왕이면 혁명이란 멋진 단어를 쓰십시오.” 그러나 적절한 용어는 쿠데타다. “그카면 쿠데타야.” 성패와 관계없이 쿠데타는 쿠데타다.

「 전두환의 정권 장악 다룬 영화
역사 사실에 기반한 극적 재연

12·12는 명백한 ‘못생긴’ 쿠데타
“내 말을 따르라” 일방적인 강요

쿠데타는 위법의 문제 아니다
법을 초월해 ‘시녀’로 만드는 것

영화 ‘서울의 봄’의 인기가 뜨겁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되돌려본다. 영화에서 반란군에 맞서는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을 연기한 배우 정우성. [사진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전두환 세력은 왜 쿠데타를 일으켰나. ‘서울의 봄’은 몇 가지 대답을 제시한다. 일단, 합수본부장으로 기세등등하던 전두광이 강원도 전방으로 좌천될 위기에 처한다.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선수 친 것이 12·12의 핵심이다. ‘서울의 봄’에서 그려진 전두광은 분명히 그러한 조치에 자극받아 행동에 나선 것 같다. 그러나 전두환 본인의 입장은 다를 것이다. 사리사욕에 연연하여 그 큰일을 벌였다니 말도 안 돼, 라며 펄펄 뛸 것이다.

그렇다면 전두환의 입장은 무엇일까. 지지자들에 따르면, 전두환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일을 벌였다. 그때 나라를 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곧 그 당시 나라를 망하게 할 위협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 위협이란 곧 북한의 남침이었다. 남침 가능성은 반공 교육에서 시작해서 주한미군 주둔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조치를 정당화하는 엄청난 명분이었다. 그러면 당시 전두환은 남침 가능성을 우려하여 12·12를 일으켰나? ‘서울의 봄’은 그 가능성을 일축한다. “김일성이 때려죽여도 오늘 밤 안 내려옵니다. 오늘 밤은 여기가 최전방이야.”

인간은 강력한 리더를 바란다?

사리사욕을 위해서도 아니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도 아니라면 도대체 전두광은 왜 거사를 한 것일까. 좌천 가능성은 행동의 계기를 설명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행동의 근본 원인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그랬다는 말은 사후 정당화를 제공할지 몰라도 행동의 근본 동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전두광은 추종자들에게 일갈한다. “떡고물을 먹기 위해 모여 있잖아!” 그렇다면 전두광을 움직인 떡고물 이상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이란 동물은 안 있나, 강력한 누군가가 자기를 리드해주길 바란다니까.” 전두광의 이 발언은 본편에서뿐 아니라 예고편에서도 강조된다. 박정희의 사망 이후, 정국은 그 이전보다 한층 더 혼란스러워진 반면, 사람들을 리드할 강력한 존재는 아직 출현하지 않은 상황. 이 상황을 못 견디겠다고 자백한 셈이다. 단지 전두광 개인이 못 견디겠다는 것뿐 아니라 사람들 일반이 그런 상황을 못 견딘다고 본 것이다. 제발 강력한 누군가가 나타나서 우리를 좀 어떻게 해 줘! 그와 같은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켰고, 그 결과 강권의 통치자가 등장했다.

정말 그 당시에 사람들을 리드할 강력한 존재가 부재했을까. ‘서울의 봄’에 따르면, 적어도 전두환은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당시 한국 사람들을 리드할 가장 강한 세속의 존재는 곧 국가다. 전두환의 관점에서는, 강력하게 리드하지 못하는 국가는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다. 12·12 당시 국가수반이 부재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최한규(실제에서 최규하)가 대통령으로서 엄연히 존재했기에, 전두광은 그로부터 계엄사령관의 체포 재가를 받기 위해 부심한다.

그런데 최한규는 그 어떤 의미로도 상황을 ‘리드’하지 않는다. 그가 요구한 것은 절차상의 완비였다. 즉 국방장관의 동의를 받아 오라는 것이 그가 전두광에게 한 주문의 전부였다. 즉 최한규는 자신의 권력을 사용해서 상황을 리드하기보다는, 자신의 권력을 절차 준수에 한정했다. 강력한 국가를 당연시하는 전두광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제대로 된 국가가 아니었을 것이다. 최한규는 사태의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서 정당성 찾아

어쨌거나 전두환은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란 무엇인가. 쿠데타는 단순히 법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다. 누가 노상 방뇨를 한다? 그것은 위법일 수는 있어도 쿠데타는 아니다. 누가 소매치기를 한다? 그는 잡범이지 쿠데타 수괴가 아니다. 법을 어기는 것이 쿠데타가 아니라 법을 초월하는 것이 쿠데타다. 그래서 미셸 푸코는 쿠데타 상황에서 국가이성은 ‘법 자체’에 명령한다고 말했다. 법을 어기고 지키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권위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 쿠데타의 본질이다.

법이란 사전 재가를 목표로 한다. 어떤 일이 준법이고, 어떤 일이 위법인지 사전에 공포하고, 그것을 따진다. 반면, 쿠데타는 사후 재가의 성격을 띤다. 어떤 일이 준법이고 위법인지를 소급해서라도 결정해버릴 수 있는 힘이 쿠데타에 있다. 쿠데타가 목표로 하는 것은 법을 초월하고 법을 시녀로 부리겠다는 것이므로. 사후 재가조차 가능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규하가 계엄사령관의 체포를 재가하면서, 그것이 사후 재가임을 분명히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사후 재가라는 점에서 12·12는 명백히 쿠데타였다. 그러나 그것은 못생긴 쿠데타였다. 쿠데타는 기존 법질서를 무시하기 때문에, 법에서 자기 정당성을 찾지 않는다. 실정법에서도, 자연법에서도 찾지 않는다. 고도로 발전한 쿠데타는 자신의 정당성을 하느님의 뜻에서도, 개인의 양심에서도 찾지 않는다. 국가이성에 기반한 쿠데타는 자기 스스로에서 정당성을 찾는다. 나는 나니까, 내 말을 따라라! 이것이 쿠데타의 궁극적 논리다. 지금부터 나의 권위를 받아들여라! 이것이 합법이기에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니고, 신의 뜻이기에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니고, 양심을 따르는 길이기에 받아들이라는 것도 아니다. 나는 나이므로 너희들은 나를 받아들여라! 따지지 말라! 따지면, 그 어떤 것도 정당하지 않으므로.

황정민과 정우성, 캐스팅 미학

굳이 말하자면, 고도로 발전한 쿠데타는 자신이 아름답기에 자신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성질 사나운 미남미녀와도 같다. 정말 아름답다면 그것은 추종자를 만들 것이다. 마치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이 추종자를 거느리듯이, 쿠데타도 충분히 아름답기만 하다면 나름의 추종자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12·12는 못생긴 쿠데타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서울의 봄’ 캐스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독은 전두광 역에 배우 황정민을 캐스팅하고 추한 분장과 연기를 주문한다. 반면, 전두광에 대항하는 장태완(영화에서 이태신)의 역에 한국의 대표 미남 배우 정우성을 캐스팅하고 누구나 탐낼 만한 연기를 주문한다. 즉 전두광에게 심미적 권위를 박탈하고 이태신에게 심미적 권위를 부여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전두광의 화장실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화장실에서 전두광은 추한 표정으로 소변을 본다. 그리고 흰 수건을 땅에 던지고 그 위에서 군화 바닥을 거칠게 닦는다. 이런 장면은 이태신이 결전을 앞두고 머플러를 섬세하고 위엄있게 목에 감는 장면과 대조된다. 전두광의 용변 장면과 달리 이태신의 머플러 장면은 마치 비극적 영웅이 예식을 집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태신은 무력 대결에서 패배하지만 심미적으로는 승리한다. 반면 쿠데타 수괴는 무력 대결에서 승리하지만 심미적으로 패배한다.

시험대에 오른 민주화 세력

심미적으로 열악한 쿠데타는 별수 없이 도덕적 서사에 의존하게 된다. 알다시피 전두환 정권의 국정 목표는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는 위선이란 악이 미덕에게 바치는 경의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쿠데타 세력이 자기 정당화를 위해 도덕을 차용하는 것은, 못생긴 쿠데타가 도덕에게 바치는 경의였다고 할만하다. 그 시대 진정한 도덕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약 반년 뒤의 광주 민주항쟁을 통해 분명해진다.

1980년대 한국의 문민화와 민주화는 광주 민주항쟁의 희생을 정치적 동력 삼아 전개되었다. 그 이후 약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쿠데타 세력과 마찬가지로 민주화 세력마저도 심미적 도덕적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21세기 한국 정치가 멈추어선 자리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Copyright©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