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MZ사원이 착해졌어요"…불황 한파 '리텐션 시대' 왔다
재계 15위권 대기업의 주력 계열사에 몸담고 있는 김영호(가명) 과장은 최근 퇴직 의사를 접었다. 대졸 공채로 입사해 10년 넘게 다녔지만, 한동안 ‘번 아웃(burn out·소진)’ 증후군을 심하게 앓아온 그였다. 고용 시장이 급속도로 얼어붙으면서 회사를 그만두겠단 생각을 접다. 심지어 이직을 도와주던 헤드헌터조차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그를 말렸다.
경기도 판교 소재 정보기술(IT) 업체에 재직 중인 A씨도 김 과장과 비슷한 이유에서 당분간 이직을 포기했다. 그는 서울 소재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프로그래머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교적 이직이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는 4일 중앙일보와 전화 통화에서 “예전엔 이직 희망 기업에 이력서를 보내면 바로 직무 제안이 오고,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면접 일정을 잡혔다”며 “최근엔 아예 연락이 없거나, 한참 뒤에 연락이 와서는 서류 전형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당분간은 지금 회사에 다니며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불황과 ‘일자리 감소’ 급습
이른바 ‘파이어족(FIRE·경제적으로 안정된 조기 퇴직자)’으로 대변되던 조기퇴직·이직 바람이 빠르게 잦아들고 있다. 암호화폐 강세와 호경기의 영향으로 흥청거리던 이직 시장이 빠르게 식어가면서다. 대신 이 자리를 이직을 자제하고 재직 중인 회사에 더 오래 다니려는 ‘리텐션(Retention·유지)’ 분위기가 채워가고 있다. ‘리텐션 보너스’는 원래 유능한 인재의 장기근속을 유도하기 위해 도입된 보너스 제도를 뜻한다. 최근 불어닥친 불황 덕에 직원 스스로 재직 중인 회사에 최대한 오래 머물려 하는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익명을 원한 한 대기업 인사(HR) 담당 임원은 “‘할 말은 하는’ 것으로 알려진 MZ세대 조차 자세를 낮춘 모습이 눈에 띈다. 일부에선 ‘우리 MZ가 착해졌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라며 씁쓸해했다.
실제 주요 대기업은 사람을 새로 뽑을 여력이 없다. 일감이 넘쳐나던 배터리 업계가 대표적이다. 최근 임원 인사를 한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 등은 승진을 최소화하는 동시에 전체 임원 수를 줄이거나, 유지하는 선에 그쳤다. 이 중 일부는 임원 수를 두 자릿수 이상 줄였다.
에코프로그룹은 최근 진행 중이던 포항캠퍼스 신입·경력 직원 채용 절차 진행을 내년 상반기로 연기했다. 채용 전형이 진행되는 중간에 절차 자체가 미뤄진 건 이례적이다. 그만큼 현재 상황이 만만치 않다는 의미다. 주식시장에서 ‘황제주’로 불렸던 에코프로의 지난 3분기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해 69% 줄어든 650억원에 그쳤다. 전기차용 양극재를 생산하는 자회사 에코프로비엠도 3분기 영업이익은 같은 기간 67.6% 줄어든 459억원이었다.
“1년 넘게 구직 중” 자조도 상당수
가장 곤란한 상황에 놓인 건 지난해 말과 올해 초 퇴사한 뒤 재취업을 시도하는 이들이다. 취업 카페 등을 중심으로 “1년 넘게 구직 중”이라는 자조도 빠르게 퍼져나가는 분위다. 취업 준비생들의 걱정도 커지고 있다. 한국경제인협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올해 대학 졸업생의 예상 취업률은 49.7%에 그쳤다.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 과정의 어려움으로 ▶경력직 선호 등에 따른 채용 기회 감소(26.3%) ▶원하는 근로조건에 맞는 좋은 일자리 부족(22.6%) ▶실무 경험 기회 확보 어려움(17.2%) 등을 꼽았다.
서점가에서도 일찌감치 이런 분위기가 반영되고 있다. 얼마 전까지『내일 퇴사합니다(2020년)』 『서른살 비트코인으로 퇴사합니다(2021년)』 같은 책이 인기였다. 최근에는 직장생활 노하우 등을 알려주는 책이 잘 팔리고 있다고 한다. 헤드헌팅 업체인 드래곤HR의 박용란 대표는 “그동안 ‘일자리 방파제’ 역할을 해줬던 대기업들이 올해 승진자 수를 최소화하면서 고용 시장 경직이란 큰 흐름이 확실해졌다”며 “글로벌 거시 환경 악화 등으로 인한 불경기의 영향이 커지고 있는 만큼 리텐션 분위기는 더 뚜렷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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