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조원 날아갈 판…"충격 반전" 뉴질랜드 '담배 금지법' 폐기 [세계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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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배 없는 미래를 향한 한 걸음 진전. 수천 명이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게 될 것” "
세계 최초의 ‘금연 세대 법(smoking ban generation)’을 발의한 아이샤 베럴 뉴질랜드 보건부 차관은 지난해 12월 이 법이 의회를 통과하자 이렇게 말했다. 외신들은 이 소식을 보도하면서 뉴질랜드에 ‘담배를 모르는 세대’가 나올 것이라고 전했다. 이 법이 2027년에 성인이 되는 2009년 1월 1일 출생자부터 담배를 영원히 구매할 수 없도록 규정했기 때문이다.
이 법은 “세계 최고 수준의 금연 정책(BBC)”이란 평가를 받았다. 어린 세대에게 담배를 팔면 15만 뉴질랜드 달러, 우리 돈 1억 2000만 원 넘는 벌금을 내야 한다. 내년 말까지 담배 판매 매장 수도 현재의 10% 수준인 600개로 줄이기로 했다. 법이 제대로 실행된다면 뉴질랜드는 30년 뒤엔 환갑 넘는 노인만 담배를 피우는 ‘담배 청정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스모크 프리(Smoke-Free·담배 없는 사회)’를 향한 뉴질랜드의 전진은 발을 떼기 전에 멈춰 섰다. 지난 27일 BBC·가디언에 따르면 지난달 총선에서 집권한 뉴질랜드 보수 연정이 금연 세대 법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 이 법은 내년 7월 시행 예정이었다.
주된 이유는 세수 부족이다. 니콜라 윌리스 신임 재무장관은 내년 3월 금연법을 폐지하고 담배 판매 수익은 세수에 보태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금연법이 시행됐다면 정부 장부에 약 1조 2900억 원의 세수 손실이 기록됐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금연정책, 정권 교체에 '급선회'
뉴질랜드는 담배 가격을 해마다 큰 폭으로 올렸다. 지난해 뉴질랜드에선 말보로 한 갑(20개비)의 가격은 22달러(약 2만 8000원)다. 2019년엔 1만 원 대 가격보다 2배로 껑충 뛰었다. 가장 비싼 담배를 파는 이웃 나라 호주(약 26달러)에 이어 2위다.
금연을 국가적 과제로 추진한 뉴질랜드의 목표는 2025년 부탄·투르크메니스탄에 이어 선진국 첫 ‘금연 국가(smoke free)’ 진입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흡연자가 전체 인구의 5% 미만이면 금연 국가로 분류한다.
흡연의 해악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세계 주요국에서 금연 정책은 발표될 때마다 논쟁이 적잖다. 매년 전 세계적으로 약 800만 명이 직·간접적 흡연으로 사망하고, 우리나라에서도 2019년 기준 흡연으로 인한 연간 사망자 수가 5만 8000명에 이른다. 금연 정책의 주된 반대 논리는 개인의 자유(흡연권)와 함께 담뱃세 등 정부 세수의 감소 우려다. 또 금지 일변도의 정책으로 담배 암시장이 형성될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뉴질랜드 금연정책의 급선회를 두고 BBC는 “충격적인 반전(Shock reversal)”이라고 표현했다. BBC는 이 법이 뉴질랜드에서 매년 최대 5000명을 살릴 수 있고 세계 의료계의 ‘뉴질랜드식 금연 모델’이 될 수 있었다고 전했다.
정부의 갑작스러운 결정에 뉴질랜드 보건 전문가들도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BBC에 따르면 뉴질랜드 보수 연정을 주도하는 국민당은 선거 기간 금연법을 폐지하겠다고 예고한 적이 없다.
윌리스 재무장관은 연정 파트너인 뉴질랜드 액트당·제일당이 “이 법의 폐지를 고집했다”고 말했다. 지난달 총선에서 6%를 득표한 제일당의 공약 중 하나가 “금연 정책 철회”였다.
금연법 폐지 공식화…“뉴질랜드, 저신자 아던 시대와 결별”
크리스토퍼 럭슨 신임 총리는 지난 29일 “100일 안에 시행할 49가지 정책”을 발표하면서 ‘금연법 폐지’를 공식화했다. 49가지 정책 안엔 교내 휴대전화 금지·마오리족 보건 당국 폐지·해양 석유 및 가스 탐사 허용 등 보수 정책들이 주로 포함됐다.
이날 럭슨 총리는 금연법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다만 “경제를 살리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면서 폐지 이유를 암시했다.
이에 대해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진보주의 아이콘, 저신자 아던 시대의 공식적 종말”이라고 분석했다. 전 정권인 저신자 아던 전 총리(2017-2023)가 도입했던 상당수 진보 정책을 되돌리는 발표였기 때문이다. 올해 초 사임을 발표한 아던 총리에 대해 주요 외신은 ”세계적인 진보 아이콘(a global icon of the left)으로 떠오른 인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이번 금연법도 아던 총리 재임 기간 통과됐다.
“마오리족에겐 재앙”…다른 나라에도 영향 줄 듯
‘금연 세대’ 법안 폐기로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가장 큰 피해를 볼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가디언은 “마오리 공동체에 재앙(Catastrophic for Māori communities)”이라고 전했다. 마오리족의 흡연율이 22.3%(2021년)로 집계된다. OECD 평균의 절반인 뉴질랜드 성인 흡연율(8%)에 비해 약 3배 가까이 높다.
전 세계 금연 정책의 흐름에도 영향을 줄 전망이다. 덴마크도 지난해 초 뉴질랜드와 비슷한 '다음 세대 영구 금연' 계획을 발표했지만 결국 좌초했다. 영국은 뉴질랜드의 금연법 제정에 영향받아 관련 입법을 추진하고 있다.
BBC는 “뉴질랜드의 번복 이후에도 리시 수낵 영국 총리 입장은 변함이 없다”고 보도했다. 수낵 총리는 지난달 보수당 전당대회에서 만 14세 이하 청소년들을 ‘비흡연 세대’로 만든다는 구상을 깜짝 발표했다. 폐기된 뉴질랜드 법안과 비슷하다. 현재 18살인 담배 구매 가능 연령을 해마다 1년씩 올리면 2040년 이후론 청년세대 흡연이 사실상 중단된다는 계획이다.
뉴질랜드에 이어 ‘담배 모르는 세대’를 꿈꾸는 영국도 아직 의회 통과를 확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리즈 트러스 전 총리는 수낵 총리의 금연 정책에 대해 “소름이 끼칠 정도로 편협한 (hideously illiberal) 것”이라며 반대표를 행사할 것임을 시사했다.
문상혁 기자 moon.sanghy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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