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윤의 딴생각] 아무 것도 아닌 일들

2023. 12. 2.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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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톡이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비단 나의 카카오 주식 수익률이 곤두박질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카카오톡은 대인 관계에 적잖은 지장을 준다. 상대방이 메시지를 읽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연인이 이별하고 또 얼마나 많은 직장인이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상사에게 들볶이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가깝지 않은 사람끼리는 문자로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까지 생겼겠는가. 이러한 현상은 전 국민이 카카오톡에 시달리고 있다는 방증이라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보다 나를 더 괴롭게 하는 건 ‘생일 알림’ 기능과 ‘선물하기’ 기능이다. 아내의 생일을 매년 깜빡하는 남편에게는 목숨 구제용으로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겠으나 나는 그 누구의 생일도 알고 싶지 않다. 그런데 친구 목록 상단에, 그것도 생일 며칠 전부터, 새빨간 케이크 아이콘으로 눈길을 사로잡으며 친구의 생일을 확인하라고 공지하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모르는 척 넘기자니 미안하고, 축하한다는 말로 때우자니 찝찝하고, 선물을 보내자니 썩 내키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까지 이러한 부담을 주기 싫어 내 생일을 보이지 않도록 설정해 놓았다. 문제는 그런데도 내 생일을 기억해 매년 선물을 보내오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의 이십년 지기이다.

아니, 지기란 ‘자기의 속마음을 참되게 알아주는 친구’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이제 더는 이 단어가 어울리지 않겠다. 한때는 서로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으나 이제는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나를 은근히 도외시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긁어 부스럼일 것 같아 그만뒀다. 그렇게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우리는 결국 연락을 하지 않게 되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라는 ‘진달래꽃’의 한 구절처럼 나는 그녀를 조용히 보내려 했다.

그러던 중 돌아온 내 생일, 그녀가 별안간 카카오톡으로 상품권을 보내왔다. 그것도 ‘잘 지내지? 언젠가 보자’ 하는 떨떠름한 메시지와 함께.“보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언제 한번 보자’는 말은 들어봤어도 ‘언젠가 보자’는 말은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보네.” 물론 그것은 보지 말자는 뜻에 가까웠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와 나는 서로의 생일에 카카오톡으로 선물을 주고받는 일만은 멈추지 않았다.

그건 아마 별다른 계기도 없이 관계를 끝맺을 용기가 없기 때문일 터였다. 그녀가 보내오는 선물을 받는 일은 폭탄을 끌어안는 것처럼 괴로웠다. 내가 보내는 선물을 받는 그녀의 심정 역시 다르지 않았으리라. 그렇게 몇 년간 아슬아슬하게 오가던 폭탄은 얼마 전 펑 터져버리고야 말았다. 그녀의 생일을 맞아 내가 보낸 선물을 그녀가 받지 않은 것이다.

차라리 잘됐다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괘씸했고, 앞으로 잘 살기를 바랐다가도 내가 더 잘 살 테니 두고 보라고 이를 갈았으며, 카카오톡을 차단해 버릴 거라고 분통을 터뜨렸다가도 그녀의 인스타그램을 몰래 훔쳐보기도 했다. 우리의 관계를 시작부터 지켜봐 온 언니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대는 나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내 앞에 등장한 모든 존재는 나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나타난 것이라고. 그러니 이번 일을 계기로 그 친구가 어떠한 깨달음을 주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그리고 그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면 나를 한 단계 성장시켜 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라고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애를 써도 우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문장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다지도 치졸한 사고방식을 지닌 스스로가 못 견디게 짜증스러웠으나 이것 역시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렷다. 그래, 이러한 깨달음을 주기 위해 그 긴긴 세월 동안 내 곁에 머물며 추억을 만들어 주고 홀연히 떠나가 버리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그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자.

더불어 그다지도 귀하게 여겼던 우정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녀를 향한 원망 역시 아무것도 아닐 터이니 이제 그만 쓸데없는 미움을 거두자. 하물며 카카오 주식 수익률이 마이너스인 것이 뭐 그리 대수랴. 세상만사 전부 다 아무것도 아니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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