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의 논쟁 김상헌과 최명길

김삼웅 입력 2023. 11. 30. 07:33 수정 2023. 12. 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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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인물 100선 30] 김상헌과 최명길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지금부터 360여 년 전 병자년에 '인조반정'을 통해 등극한 인조는 친명모화(親明慕華) 세력에 업혀서 신흥 청나라를 적국으로 만드는 서툰 외교정책을 펴다가 민족 만대의 치욕을 겪었다.

청태종이 직접 13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삽시간에 강화도를 점령했다. 강화도에는 왕자와 비빈 등 왕족이 피난해 있었다.

인조도 강화도로 피난을 갈 계획이었지만 청군의 선발대가 워낙 재빨리 강화도로 가는 길목을 차단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난처를 옮겨야 했다.

강화도를 점령한 청군은 왕족을 볼모로 잡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청군의 공격을 받은 정부군은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였지만 적군은 이중삼중으로 성을 포위한 데다 왕족과 수많은 대신들이 그들 손아귀에 잡혀 있었다. 그리고 지원군도 끊겨서 남한산성은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날씨는 추워지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냈다. 당연한 일이지만 결사항전파와 화친을 맺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가 대립하였다. 주화파는 눈물로 항서를 쓰고, 척화파는 이것을 찢기를 거듭하다가 마침내 항복을 하기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세자와 함께 청나라 군복 남용복(藍戎服)을 입고 한강 동편 삼전도(三田渡)에 마련된 수강단(受降壇)에서 청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다. 청태종에게 절을 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려야만 했던 것이다.

인조의 투항에 앞서 남한산성에서는 여러 날을 두고 화·전 두 세력 사이에 국가의 명운을 건 일대 논쟁이 거칠게 전개되었다. 1636년 12월 6일, 남한산성에서는 화의교섭을 둘러싸고 장시간에 걸쳐 어전회의가 계속되었다.

이 회의석상에서 소현세자는 "자신의 희생으로 국난이 타개될 수 있다면, 불모가 되어 청군 진영으로 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영의정 김류, 좌의정 홍성봉, 우의정 이성구, 호조판서 김신국, 이조판서 최명길 등이 세자의 용단에 찬동하여 국왕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예조판서 김상헌이 분연히 떨치고 일어서서 "그대들은 명색이 나라의 중신들로서 어찌 세자 저하로 하여금 적진에 불모로 들어가는 치욕을 자청하도록 하는가! 내 맹세코 그대들을 죽여 없애서 그대들과 이 세상을 함께하지 않겠노라." 라고 호통쳤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길 원하는 척화파 김상헌(김윤석 분) - 영화 <남한산성> 스틸컷 中
ⓒ CJ 엔터테인먼트
 
김상헌의 이 같은 강경 발언으로 다시 열띤 논쟁이 벌어지자 인조는 "지금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모두가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여 의견을 말하는 것이니, 서로 배척하지 말고 뜻을 한 데로 모으기 바란다"라고 김상헌을 만류하였다.

논쟁은 다음 날에도 이어져 종실인 의창군 이광과 동양위 신익성 등이 세자를 볼모로 보내자는 주장을 통렬히 배척하면서 주화론자들의 목을 벨 것을 주청하였다. 이와 같은 척화 강경론자들의 거센 화의 반대로 여론은 척화론 쪽으로 기울고, 조정에서는 화의교섭의 중단을 청국 측에 통고했다.

이에 따라 청국 측은 세자 대신 왕자를 볼모로 보낼 것을 요구하는 다소 완화된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조정은 이를 거절하고 장기 항전의 방침을 굳히고 있던 중, 12월 30일 청태종이 직접 주력부대를 이끌고 삼전도에 도착, 남한산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청태종의 남한산성 포위는 조정의 여론을 척화론으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성 안의 군신 상하가 최후의 일전으로 순국의 길을 택하자는 강경한 논의가 제기되었다. 장령 이후원은 "군왕은 사직을 위해 몸을 바치고 신하는 군왕을 위해 죽을 뿐이니, 여기에 무슨 여한이 있겠는가? 끝까지 싸우는 길밖에 없다."고 장렬한 최후의 결전을 인조에게 상주하였다.
 
 화친을 읍소하는 최명길.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 CJ엔터테인먼트
 
그러나 최명길 등 주화파들은 여전히 '위로는 종묘사직이, 아래로는 허다한 생명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차마 그러한 결단을 내리기는 어렵다'고 협상론을 제기하였다.

이렇게 논의가 거듭되고 있을 때 1월 18일 청국 측은 사자를 보내어 '조선 국왕이 속히 성을 나와 항복을 하거나 아니면 19~20일 양일 간에 걸쳐 일전을 결하자'는 최후 통첩을 해 왔다.

이에 따라 왕명으로 최명길 등이 회군하는 청국 황제를 국왕이 성상(城上)에서 전송하는 예를 취하도록 하자는 내용의 국서를 쓰고 있을 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그 국서를 갈기갈기 찢어 내팽개친 다음 최명길에게 "그대의 선친은 도덕과 의리로 명망이 높은 분이셨는데, 그대는 어찌 이처럼 서슴없이 군부를 욕되게 하는가"라고 꾸짖었다.

최명길은 찢어진 국서를 주워 모아 풀로 붙이면서 "대감의 나라를 위하는 충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나 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이다. 대감이 또 다시 국서를 찢으면 다시 붙이겠다"면서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국서가 청국 측에 보내지면서 김상헌은 사처로 나가 식음을 전폐하고, 다른 척화론자들도 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척화론자들의 강경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명길 등이 청국 진영으로 가서 국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저들은 조선이 신하라고 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이때 참찬 한여직이 최명길에게 "구구한 명분에 얽매이지 말고 '신'(臣) 자 한 자를 더 써 넣어서 보내도록 하자"고 촉구하여, 다시 개서한 국서를 청국 측에 전달 하였다.

그러나 청국 측은 다시 인조의 출성(出城) 항복과 척화파의 압송을 요구하면서 국서의 접수와 회답을 거부하였다. 다시 조정에서는 이조참판 정온 등이 '칭신'하는 국서를 쓴 최명길을 극형에 처할 것을 주장하고, 청국 측은 인조의 출성항복과 척화파 압송 이외의 어떠한 화의 조건도 거부한다는 최후 통첩을 산성으로 보내왔다.

마침내 인조는 강화도의 함락으로 포로가 된 왕족과 신하들의 신변 걱정과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서 혹한에 시달리는 병사들의 사기를 지켜보면서 출성하여 청태종에게 항복할 것을 결심하였다. 식음을 전폐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던 김상헌 등이 청군 진영에 압송되어 갈 것을 자원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조는 청태종에게 항복하고, 척화파의 오달제, 윤집 등은 소현세자와 함께 청국으로 압송되고 나중에 김상헌도 끌려갔다. 주전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주화론을 전개했던 최명길은 후일 다른 사건으로 역시 청국에 끌려가 같은 감옥에서 김상헌과 만나 서로의 애국심을 이해하면서 오해를 풀었다.

최명길은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이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할 때, 이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였다. 이를 두고 후세사가는 "결지자(結紙者)도 충(忠)이요 열지자(裂紙者)도 충"이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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