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미리 물러나는 특권

입력 2023. 11. 30.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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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면 12월이다. 연말이 되면 우리는 곧 찾아올 한 해에 대한 낯선 기대에 사로잡히곤 한다. 하지만 새로운 해를 잘 맞이하는 비법은 지난해를 잘 보내는 일이다.

한 해 계획을 탄탄히 만들고 이를 실천해보고자 열심히 노력할지라도 새해의 새로움은 머지않아 곧 퇴색한다. 이는 내가 세운 계획이 허황하거나 나의 의지가 충분히 강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작심삼일이란 운명을 피하기 어려운 이유는 인간이란 존재가 삶의 관성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지난해로부터 충분히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새해를 잘 맞이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12월에 필요한 것은 우리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희망에 부풀게 하기도 절망시키기도 또 뭔가 성취하게 하기도 실패하게 하기도 했던 지난 한 해로부터 물러나는 지혜와 결심이다.

자기가 하던 그 무엇에서 물러서기란 성과와 성취에 중독된 현대인에게 쉽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일이다. 실제 우리는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면 업적이 쌓인다는 막연한 생각에 계속 일을 한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도 말이다. 시인 데이비드 화이트가 진단하기에 인간이 하던 일에 계속 매달리는 근원적 이유는 “작정한 인생 이야기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 갇혀 있으면 중요한 일에 헌신한다면서도 핵심에서 벗어나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게 된다. 대상에 기울여야 할 진지한 관심 대신 호기심에 끌려다니고 우리의 언어는 신변에 관한 잡담으로 전락한다.

‘내가 만든 내 삶의 이야기’가 그대로 있는 한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우고 결심을 단단히 할지라도 삶이 달라지기는 어렵다. 반면 그 이야기에서 물러선다면 나를 부자유하게 하던 거짓된 성공, 거짓된 실패, 거짓된 친구, 거짓된 적, 거짓된 자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제야 우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있는 그대로 대할 수 있게 되고 사태의 핵심에 도달할 길을 되찾게 된다. 이에 화이트는 물러남(withdrawal)을 “앞으로 나아가서 제대로 해내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새해를 앞두고 필요한 것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옭매던 상태로부터 한 발짝 멀어지는 용기와 결단이다. 하지만 이는 하던 일에 계속 매달려야 더 나아질 것이라는 모호한 기대, 새로운 계획을 잘 세워야 성공한다는 믿음에 어긋나기에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어려움에 빠진 현대인에게 그리스도교는 어떤 지혜를 줄 수 있을까.

태양력에서 마지막 달 12월은 교회력의 새해 첫 달과 상당히 많은 날이 겹친다. 크리스마스로부터 4주 전 주일인 대림절 첫날 교회력이 새로 시작되기 때문이다. 대림절은 옛 세상을 심판하고 새 창조를 가져오신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희망으로 일상적 시간을 채우는 기간이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가지고 나를 옭매던 삶의 이야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때다. 내가 만들어 간, 하지만 나도 모르는 새 나를 부자유하게 한 이야기에서 해방됨으로써, 세상을 새롭게 대하고 삶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이로써 세상을 더욱 명료하고 진실하게 보고 삶에 대해 분명하면서도 관대하게 말하는 법도 배우게 된다.

두 달력의 시차 속에서 우리는 지난해 매여 있던 여러 일에서 미리 물러남으로써 새해를 진정 새롭게 맞이하도록 준비할 여유를 갖게 된다. 모두가 태양력에 따라 바삐 살아가는 세상에서 교회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독교는 피조물인 태양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시간의 주(主)이심을 믿는 종교다. 그러니 12월이 되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그 숨은 의미가 드러나는 선물같이 주어진 은혜의 시간이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잊지 말자. 그 신비로운 시간의 초청에 모두 기쁘게 응답하는 연말을 보내길 바란다.

김진혁 교수(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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